“아들 얘기 나오면 아직 눈물 나… 공감해 준 시민들에 감사”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문중원 기수 아버지 문군옥 씨

6월 30일 고 문중원 기수의 아버지 문군옥 씨의 제주도 사무실에서 문 씨가 문 기수의 추모집을 들고 그동안 일들을 회상하고 있다.

지난달 30일 오전 제주국제공항 출구 앞에 고 문중원 기수의 아버지 문군옥 씨가 서 있었다. 올 3월 문 기수의 영결식이 열릴 때만 해도 그의 눈빛은 분노와 슬픔을 오가며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러기에 웃는 얼굴로 반겨주고 농담도 던지는 지금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묘한 안도감을 줬다. 어쩌면 그의 아픔도 서서히 아물 때가 왔을 수도 있다.

착각이었다. 그의 제주도 사무실 곳곳에 ‘문중원을 살려라’나 ‘문중원 열사 진상규명’ 같은 팸플릿이 걸려 있고, 책상 위엔 아들 기사가 실린 신문과 문 기수 추모집 같은 자료들이 쌓여 있다. 문 씨는 “이제 치워야 하는데…” 라며 자료들을 책상 귀퉁이로 정리했다. 자료를 만지는 그의 손은 깨지는 물건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많은 이들이 힘 보태 줬는데
어떻게 고마움 갚아야 할지…
장례식장서 동료 기수들 보니
꼭 아들 중원이 같더라
이들이 억울함 호소할 수 있는
기수 노조 생겨 의미 깊다”

본격적으로 문 기수의 이야기를 꺼내자 문 씨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문 씨는 “중원이 일로 도움을 준 사람들한테도 고맙다는 인사를 제대로 못 하고 있다. 중원이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이 나서 대화를 이어나가기가 힘들다”고 했다.

지난해 11월 문 기수가 부산경남경마공원 기숙사에서 숨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곧장 부산으로 달려왔다. 영안실에서 만난 아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고 한다. 문 씨는 “중원이의 눈을 이 손으로 쓰다듬으니, 눈을 감더라”고 했다. 아들의 눈을 감겨주는 그 손은 얼마나 흔들렸을까.

문 씨는 아들을 제주도에 있는 집안 선산에 묻으려고 했다. 하지만 문 기수는 유족에 남긴 별도 유서에서 화장을 부탁했고, 지금은 화장 뒤 경남 모처에 안치했다. 문 씨는 “제주도 선산에 묻으면, 가까이 있는 부모들이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 같아 화장을 부탁한 것 같다”며 “중원이는 그런 아들이었다”고 말했다.

문 기수는 남에게 피해 주는 걸 부끄러워하고 원칙주의자 성향도 있었다고 한다. 조교사 개업을 하려면 윗사람들과 친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지만, 실력으로 정면 돌파하겠다며, 사비로 경마선진국으로 연수를 떠난 것도 이런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 기수가 세상을 등진 뒤 유족들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시간을 보냈다. 문 기수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시민대책위 등이 꾸려지고, 집회와 추모 활동이 매일 벌어졌다. 문 씨는 거의 모든 현장을 함께했고, 매일 원고를 쓰고 마이크를 잡아야 했다. 문 씨는 “서울 광화문 텐트에서 자도 추운 줄 몰랐고, 오체투지를 해도 힘든 줄 몰랐다. 중원이 문제에 이렇게 많은 이가 힘을 보태 주는데 어떻게 힘들 수 있겠느냐”며 “오히려 그렇게 정신없이 그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육체보다 마음이 힘들었다. 특히 음해성 소문이 유족을 서럽게 했다. 가족 간 불화로, 때로는 돈 문제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문 기수의 아내가 여러 집회에서 남편을 회상하는 장면을 봤다면 누구나 문 기수가 얼마나 화목한 가정을 꾸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문 씨 역시 꽤 큰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어, 문 기수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환경에 노출되지도 않았다. 심지어 실력이 없어 심사에서 떨어진 것 아니냐는 말들도 있었다. 문 씨는 “외부평가위원들이 합격점수를 줬는데 마사회 직원들이 너무 낮은 점수를 줘 떨어진 게 공개됐고, 그런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며 “이미 주변 사람들은 중원이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다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오랜 줄다리기 끝에 마사회가 여러 개선대책을 내놓으면서, 100여 일 만에 문 기수의 영결식이 가까스로 열릴 수 있었다. 완벽한 대책은 아니더라도, 유족들에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는 일이었다. 문 씨는 “많은 이의 관심 덕분이었다. 아픔에 공감해 준 이들에게 어떻게 고마움을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기수 노조가 설립된 것에 큰 의미를 부였했다. 문 씨는 “기수들은 다들 체구가 작은 편인데, 식장에서 양복 차림의 동료기수들을 보니 꼭 중원이 같더라”며 “이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생긴 것이니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근심거리도 생겼다. 문 씨는 “혹시나 기수들이 밉보여 보복성 일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라며 “그러니 시민들에게 계속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 주기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문 기수 사건이 수습국면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 역시 시민의 공감과 관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문 기수 이전에 이미 이곳에서 6명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때 불의에 분노하는 여론이 형성됐다면, 어쩌면 지금 문 기수는 가족들 곁에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몰려왔고, 환하게 웃는 아들의 사진을 충혈된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문 씨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글·사진=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