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인문학 기행] 12. 오스트리아 빈 쇤브룬 궁전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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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했던 시시 황후 기억 간직한 아름다운 궁전

글로리에테에서 내려다본 쇤브룬 궁전 전경.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곳에는 비운의 황후 시시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글로리에테에서 내려다본 쇤브룬 궁전 전경.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곳에는 비운의 황후 시시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16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아누스 2세는 빈 강 인근의 넓은 땅을 사들였다. 황족이 귀족들과 어울려 사냥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사냥 도중 아주 아름답고 물맛이 좋은 샘이 발견됐다. 황제는 ‘아름다운 샘’이라는 뜻인 쇤브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럽에서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이유, 독일 뮌헨의 님펜부르크와 함께 가장 아름다운 궁전으로 손꼽히는 쇤브룬 궁전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16세기 빈 인근 황족·귀족 사냥 공간

열여섯 살 시시 황후 신혼살림 차린 곳

황실 간섭·자식들 죽음 등 불행 겹쳐

고통 잊으려 여행 다니다 비극적 최후

본관엔 부부 침실 등 시시 흔적 가득

꽃 만발 정원·분수·별장 볼거리 풍성


쇤브룬 궁전에서 바라본 정원. 쇤브룬 궁전에서 바라본 정원.

첫눈에 반한 황제의 사랑

1853년 8월 오스트리아 바트이슐에 있는 합스부르크 황가의 여름별장 카이저 빌라에서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바이에른공국 막시밀리안 공작의 맏딸 헬레나의 약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황제의 어머니와 헬레나의 어머니는 친자매였다. 그러니 황제와 헬레나는 이종사촌이었다.

황제는 왈츠를 추자는 여러 귀족 여성의 제의를 정중하게 뿌리치고 행사장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한 소녀를 발견했다. 가슴이 콩콩 뛴 그는 꽃병에서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꺼내 건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세상에서 만나본 많은 소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여! 나와 결혼해 주시겠소?”

소녀는 헬레나의 동생인 엘리자베트였다.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태후는 황제를 여러 차례 타일렀지만, 이미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엘리자베트를 불러 물어보았다.

“황제가 너를 사랑한다는구나. 어떻게 생각하니?”

“멋진 분 같아요. 황제가 아니라면 더 좋을 텐데.”


비극적으로 인생을 끝낸 시시 황후 전신 그림. 비극적으로 인생을 끝낸 시시 황후 전신 그림.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황후

요제프 황제와 엘리자베트의 결혼식은 1854년 4월 24일 빈 호프부르크 왕궁 인근 아우구스티너 키르헤(아우구스티너 성당)에서 치러졌다.

사람들은 엘리자베트를 시시라고 불렀다. 그녀는 당대 유럽 모든 황후, 왕비 중에서 가장 미모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시는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피눈물 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여성들과는 달리 화장품과 향수를 즐겨 사용했다. 황실 약국에 비치된 수많은 미용 제품을 써보기도 했다.

심지어 시녀들이 애용하는 화장품을 빌려 발라보기도 했다. 피부를 부드럽게 유지하려고 매일 아침 찬물로 샤워하고 저녁에는 올리브 오일로 목욕했다.

잘 때는 베개를 사용하지 않았다.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게 이유였다. 잠들기 전에 송아지 생고기나 다진 딸기를 얼굴에 바르기도 했다. 몸매를 유지하려고 매일 승마 등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음식물도 철저하게 관리했다.


■까다로운 시어머니

시시는 쇤브룬 궁전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하지만 신혼은 아름답고 황홀하지 않았다. 황제는 매일 정무로 바빠 황후에게 제대로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이모이자 시어머니인 태후는 시시에게 까다롭게 굴었다. 그녀는 18세기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간의 개성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필요성이 없어지면 언제든지 대체할 수 있다는 관념을 갖고 있었다.

법도에 얽매여야 하는 황실 생활은 시시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녀는 매일 시종장에게서 황실 법도에 어긋난다는 지적에 시달렸다. 행동 하나하나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분석하는 시종장으로부터 끊임없이 고치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시시는 결혼 이듬해 첫 딸을 낳았다. 이름은 소피라고 지었다. 불과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그녀는 딸을 무척 사랑했다. 희망도 즐거움도 없는 쇤브룬 궁전 생활에서 소피는 유일한 기쁨이었다.

태후는 며느리에게 절망을 안겨주었다. 딸을 빼앗아가 버린 것이었다. 당시 황실 법도에 따르면 왕자와 공주는 유모와 가정교사에 의해 길러져야 했다. 시시가 아이를 만나려면 미리 태후에게 알려 승낙을 받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첫딸 소피는 엄마의 보살핌도 제대로 받지도 못한 채 이듬해 죽고 말았다.


빈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글로리에테. 빈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글로리에테.

■비극적인 최후

“결혼은 정말 멍청한 일이야. 열여섯 살 아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팔려 가서 30년 동안 후회만 하고 사는 것이지.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는 게 가장 비극이야.”

시시는 결혼을 후회하게 됐다. 불면에 시달렸다. 정신적으로도 황폐해져 정신과 의사에게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일에만 매달리는 남편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시시에게 결정적으로 타격을 준 불행이 일어났다. 외아들인 루돌프가 1889년 빈 근교에서 애인과 동반 자살한 것이었다.

시시는 고통을 잊는 방법으로 여행을 선택했다. 엄청난 악몽을 안겨준 쇤브룬 궁전을 떠나 수많은 나라를 돌아다녔다. 쇤브룬 궁전에는 언제라도 떠날 수 있게 여행용 가방이 준비돼 있었다. 그녀가 사용했던 여행용품은 호프부르크 궁전의 시시박물관에 현재 전시돼 있다.

1898년 9월 10일 환갑을 넘긴 시시는 여행을 떠났다. 여러 번 간 적이 있던 스위스 제네바였다. 그녀는 다른 도시로 이동하려고 레만호에 정박해 있던 배를 타러 갔다. 낯선 남자가 다가오더니 송곳을 꺼내 가슴을 푹 찔렀다. 그녀는 큰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가슴을 찔렸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낯선 남자가 툭 치고 지나간 거로 생각했다.

배가 막 속력을 내려는 순간 시시는 꼬꾸라지고 말았다. 가슴 쪽에서 피가 조금씩 배어 나왔다. 가슴에서 계속 피가 흘러나왔다. 살릴 방도는 없었다. 의사는 팔꿈치 관절 안쪽 동맥을 절개했다. 심장에서 흐르던 피는 멈췄다. 그녀는 고통 없이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시시의 장례식은 9월 17일 화려하게 치러졌다. 평소 “내가 죽으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하게 장례를 치러 달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쇤브룬 궁전

쇤브룬은 ‘아름다운 샘’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볼거리가 풍부하다. 궁전 본관은 시시의 다양한 추억을 가득 담고 있다. 요제프 1세의 집무실, 시시 부부가 기거했던 침실도 볼 수 있다. 다만 안에서 사진은 찍을 수 없다. 그녀 모습을 담은 여러 가지 기념품도 판다.

봄, 여름에는 꽃이 활짝 피는 정원도 아름답다. 너른 정원에서 산책을 즐기는 것도 여행의 묘미다. 정원 끝에는 넵툰 분수가 나온다. 바다의 신 넵툰(포세이돈)이 삼지창을 들고 가운데 서 있다. 앞에는 트리톤 네 명이 바다의 말을 길들이고 있다.

분수를 지나 끝까지 올라가면 글로리에테가 나온다. 정원 별장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다. 1층은 찻집이고 옥상은 전망대다. 글로리에테에서, 또는 궁전 쪽으로 내려오면서 찍는 사진은 정말 멋있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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