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비평] 기자들이여 응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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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부경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소년이 범죄를 저지르면 소년원에 가고, 대학생이 잘못하면 대학원에 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대학원 생활이 고달프다는 방증이겠다. 얼마 전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한 대학원생은 이동 경로가 연구실-기숙사-연구실뿐이어서 새삼 불쌍하다는 탄식이 쏟아졌다. 필자는 학부가 다른 20명 가까운 86학번 동기들과 함께 대학원에 입학했었다. 당시 선배들은 수는 많지만 제각각 개성이 강해 학과 일에 일사불란하게 동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를 싸잡아 ‘86 쓰레기’라고 불렀다. 혼자 ‘쓰레기’라 불렸으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겠지만 다수다 보니 “그래도 나는 아니려니” 하면서 대학원 생활을 그럭저럭 잘 견뎌냈다.

이런 개인사를 들춰낸 이유가 있다. 언론사 기자를 경멸하는 ‘기레기’라는 호칭 때문이다. 본래 기레기는 야구선수 김현수 때문에 유래했다고 한다. 일명 ‘타격 기계’로 불렸던 그가 슬럼프에 빠지면, 기계가 쓰레기처럼 되었다고 해서 기레기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게 기자들을 지칭하기 시작한 계기는 ‘세월호 사건’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세월호 승객 ‘전원 구조’는 엄청난 오보였다. 아울러 잘못된 정보를 확인 절차 없이 그대로 전달한 거의 모든 국내 언론은 ‘기자+쓰레기=기레기’라는 멍에를 안게 되었다. 한국기자협회 등은 재난보도준칙을 마련하여 자성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기레기보다 더 욕된 ‘기더기(기레기+구더기)’로 부르기조차 한다.

‘세월호 참사’ 팩트 체크 소홀한 이후
국민들, 기자들 불신해 ‘기레기’ 지칭
온라인 매체·포털 기레기 온상 역할
자기 성찰로 쓰레기 취급 안 받아야

작년에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관련해 기레기 논란이 증폭되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변인 이재정 의원의 기레기 발언처럼, 기레기는 공적인 자리에서도 호명되는 처지가 되었다. 기자들은 각각 광화문과 서초동을 가득 메운 보수와 진보 세력 시위에서 공히 ‘기레기 OUT’이라는 수모를 당했다. 시위 참가자들은 상대 진영의 기자는 물론 동일 진영 기자들까지 기레기라 칭했다. 이는 사회 전체적으로 정치적 층위가 다양해졌다는 의미도 있지만, ‘합리적 진보’나 ‘합리적 보수’를 지향하는 기자들의 위치는 어정쩡해졌다.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객관성(중립)을 추구하는 기자들이 설 자리는 좁아졌고, 기레기라는 비난을 피하기도 더욱 어려워진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이 별다른 대응 없이 손을 놓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인류세(人類世)가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로 나눠질 수 있다고 하지만, 저널리즘을 가르치는 필자에게는 세월호가 침몰한 2014년 4월 16일이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그때부터 필자가 지속적으로 고민한 산물을 올여름 논문으로 출판할 예정이다. 논문 내용은 별다르지 않다. 세월호 사건에서부터 누적되어온 기레기에 대한 국민적 비판(언론개혁 포함)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전통 저널리즘(종이신문)과 온라인 저널리즘의 취재보도 관행에 문제점이 적지 않으며, 기사와 피드백의 기반이 되는 온라인 매체, 특히 포털의 환경이 기레기의 온상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세 측면이 동시에 해결되지 않는다면 기레기는 ‘기자답지 못한’ 것의 상징으로서 포털의 실시간 검색을 동력 삼아 계속 상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필자의 논문 작성 내내 기레기는 이 땅의 기자들에게 “기자다운 기자는 누구냐?”라는 항의이자 반문(反問)이란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팩트 체크 전문매체 <뉴스톱>의 김준일 대표는 7월 9일 자 기자협회보 ‘어느 나라 언론은 문제가 없을까?’란 칼럼에서 “한국 언론이 문제가 많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 어느 나라 언론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시도 때도 없이 기레기를 언급하며 언론을 준엄하게 꾸짖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준거로 많이 삼고 있는 미국도 선정적인 ‘옐로 저널리즘’의 흑역사가 있었다. 심지어 전쟁조차 돈벌이의 도구로 삼았다. 그렇지만 옐로 저널리즘에 대한 뼈저린 반성으로 객관적 저널리즘이 출현한 사실도 함께 되새길 필요가 있다. 현재 퓰리처상은 미국 기자들의 노벨상으로 일컬어지지만, 퓰리처는 허스트와 함께 옐로 저널리즘을 창안해 수익에만 급급했던 인물이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 자신과 같은 기자가 되지 말라는 뜻에서 전 재산을 털어 퓰리처상을 만들었다. 기자 개개인이 기자다움을 실현하는 주체라고 한다면, 기자라는 직업을 그만둘 때까지 기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며, 일신우일신의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당신은 진정한 기자입니까?” 물론 이 질문은 필자에게도 해당한다. “너는 진정한 스승이냐?” 86 쓰레기들이 어엿한 사회의 중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더 이상 쓰레기 취급을 받지 않겠다는 각고의 결심이 자양분이 됐다. 이즈음 ‘탈 기레기 선언’을 기대하는 건 섣부른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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