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용적률과 그린벨트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혼선을 빚고 있다. 특히 그린벨트를 해제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부처 간의 대립이 만만찮다. 거기에 환경단체와 재계의 의견이 개입 되면서 좀체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주택 공급 물량을 늘려야 하는 절박함에는 대체로 동의하지만, 그 방법에 대하여는 의견이 분분하다.

땅의 면적을 늘려 건축의 부피를 키우자는 주장과 기존 도심의 법적 용적률을 높여 여지를 확보하자는 쪽의 대립이다. 이른바 수학적 논리 싸움이다. 용적률이란 대지의 면적에 대한 건물 용적의 크기를 나타내는 도시계획 용어이다. 파생된 말로 용적률 상한제, 용적률 쿼터제, 용적률 인센티브 등 여러 가지가 있으니, 이는 용적률의 크기가 사회의 여러 문제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택공급 방식 놓고 부동산 정책 혼선
땅 면적 늘리기와 용적률 상향 대립

그린벨트 해제는 편의주의적 처방
환경 파괴 우려돼 신중한 접근을

도시 풍경의 단순·획일화 피하고
복잡다단한 생기를 불어넣어야


반면, 그린벨트는 국토의 환경 보존을 위하여 개발이 유보된 부지이다. 그것의 해제는 곧 환경 파괴로 연결된다. 당국이 쉬이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어찌 보면 도시 경제의 문제보다 더 우위에 있어야 할 명제이다. 그러니 논쟁은 당연하며 좋은 결론에 도달해야만 한다.

서울 경기 지역이 특히 심각하지만, 지방의 대도시라고 하여 예외일 수는 없다. 일과성이 아니라 지속해서 갈등을 일으킬 것이다. 실은 그것이 우리 도시의 아픈 역사였다. 근래에 와서 더욱 빈번해졌다고나 할까?

나는 이번 사태를 보며 ‘땅 짚고 헤엄치기’라는 말을 떠올렸다. 행정가의 입장으로는 기존의 도시 질서 혹은 주민들과 골치 아프고 지루한 싸움을 하느니, 그린벨트 해제라는 단순한 처방으로 해결하려는 것에 어찌 유혹되지 않았을까? 저렴한 가격으로 부지를 확보하고 집을 지어 비싼 값으로 팔아먹을 궁리를 하는 자본가들의 이기심도 보태어졌을 것이다. 사악한 저의는 늘 숨어 있다.

이즈음에 작가 ‘이탈로 칼비노’의 도시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를 떠 올려 본다. “계속 이어지는 길들, 그 길을 따라 서 있는 집들과 대문들과 창문들. 여행자는 잠 못 이루는 밤이면 그런 ‘조라’의 거리를 걷고 있는 상상을 하며 구리시계, 이발소의 줄무늬 차양, 아홉 개의 구멍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분수, 천문학자의 유리탑, 수박 장수의 좌판, 항구로 향하는 골목이 차례로 이어지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오래된 도시에 관한 추억의 소환이나 향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도시의 본질적인 의미를 읽으려 했음이다. 도시란 원래 그렇게 복잡한 곳이다. 그런 곳에서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과 부대끼며 나를 나타내기도 숨기기도 한다. 복잡하지 않으면 도시는 의미를 잃는다. 그러한 삶에 실증나면 전원으로 떠나면 될 일이다. 다시 말하여, 도시적 삶 자체가 복잡함의 연속이다.

그러한 복잡함을 단순화하여 일률적으로 끌고 가려는 것이 도시계획의 목표라면 맹점은 곧 거기에 있다. 이번의 일만 하여도 비어가는 도심을 도외시한 채 좀 더 그림 그리기 쉬운 땅을 찾겠다는 주장이 아닌가. 더군다나 그린벨트라니. 환경의 문제도 그렇지만 실은 도시의 본질적인 의미를 더 살펴야 한다. 영역의 수평적 확장은 쉬운 해결책이긴 하나 바보 같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복잡하게 생각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도시는 원래 복잡한 곳이다. 그런 관점으로 도심, 특히 원도심을 바라보면 된다. 이전의 복잡함을 다 잃어버린 허전한 거리와 퀭한 주민들의 표정들. 답은 거기에 있다. 거기에 다시 복잡다단한 생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용적률, 그게 무슨 대수인가? 더하여 도심의 높은 용적률이 오히려 도시의 매력이 된다. 다만, 여느 신도시처럼 획일적이고 일률적이고 위압적인 높이, 특히 자본의 볼모가 되는 길을 에둘러 차단하면 될 일이다. 그게 진정한 정치력이고 행정력이 아닌가?  

이종민  종합건축사사무소 효원 대표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