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A 컬렉션, 미술관 보고(寶庫) 들여다보기] 75. 네모꼴 침묵 속의 충일감, 정상화의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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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한국미술의 단색화는 1960년대 실험미술과 더불어 한국현대미술의 한 사조로 형성되면서 자리매김했다. 모노크롬회화, 단색파 혹은 백색파, 단색회화 등 다양한 이름을 두고 논쟁이 있었지만 방법론과 정신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국적 모더니즘의 독보적인 결과로 평가받고 있다.

정상화(1932- )는 동시대 미술에서 한국을 상징하는 단색화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는 매우 정적인 인상 속에서 완강한 침묵의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을 생산해 낸다.

백색의 화가로 불리던 그가 단색만으로 회화작업을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반 일본 고베에 채류했을 때로 알려져 있다. 당시 국내에서 단색화라는 양식적 특성에 대한 비평적 조명이 부족했지만 그는 독보적인 양식의 작업 세계를 이어갔다. 수십 년 간에 걸쳐 반복되는 방식의 작품은 실용주의에 대항하는 신실재론적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부재나 결핍이라고 평가 받은 초기의 작업을 끝없이 이어 온 그 자체로 충실한 작가의 정신적 현상이다.

한국의 단색화는 제작 과정과 행위가 작품의 개념과 연결되고 그 정체성으로 이어진다. 정상화의 작업도 제작 과정에서 결과로 이어지는 현실적·정신적 현상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먼저 캔버스 위에 아주 두터운 밑칠을 하고 그것이 굳어지면 캔버스와 틀을 분리한다. 뒷면에 좁은 간격의 격자선을 그리고 격자선에 맞추어 캔버스를 접은 후 선에 따라 균열이 만들어지면 다시 캔버스 천을 틀에 고정한다. 캔버스 앞면에 갈라진 작은 사각형의 파편 하나하나를 떼어 낸다. 떼어 내고 난 자리를 다시 선택된 물감으로 메꿔 나가기를 이어가는 작업은 간소하면서 치밀하게 진행된다. 전체 프로세스에서는 치밀한 계산 방식을 선택하면서도 작은 칸 속에 물감을 채워나가는 순간은 매우 유기적인 방식으로 긴 호흡을 통해 완성한다.

반복되는 사각의 형태 사이에서 시간을 동반한 이질적인 구분 현상이 발생하고, 재료의 물성에서 반응하는 현상을 육체와 고도의 집중력을 이용해 반복하는 작업을 통해 작품을 완성해 간다. 부산시립미술관은 흑색과 백색 각 한 점을 소장하고 있는데, 소개하는 정상화의 작품 ‘무제’는 1998년 작으로 백색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정종효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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