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함께하는 고개와 길] 684. 녹산 성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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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금단곶보성 너머 낙동강 풍광 ‘한 폭의 그림’

부산과 진해를 잇는 강서 성고개 전경. 조선 초기부터 금단곶(金丹串)이란 성이 있어서 성고개로 불린다. 500년 고갯길이지만 저 멀리 보이는 하늘이며 구름은 그때 그대로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세상에 그때 그대로인 것은 얼마나 소중한가. 박정화 사진가 제공

성고개는 성(城)으로 가던 고개. 성은 나라를 지키고 나를 지키던 보루. 나라를 지키고 나를 지키려고 넘던 고개가 성고개다. 그 많았던 성들. 그 많았을 성고개들. 강서구 녹산 성고개는 부산에 유일하게 남은 성고개다. 유일하게 남아서 나라를 지키고 나를 지키려고 고개 넘던 비장한 결기를 이어 간다.

성 이름은 금단곶보성. 금단곶 띄우고 보성, 이렇게 읽어야 한다. 녹산 금단곶(金丹串)에 1485년 세운 보성(堡城)이다. 보성은 읍성이나 진성(鎭城)보다 작은 성. 작은 고추가 맵다고 고개에 서린 기운은 지금도 얼얼하다. 산과 평지가 만나는 경계선을 따라 세웠던 성터 곳곳에 왜구를 감시하던 서늘한 눈빛이 서렸다.

부산 유일하게 남은 성고개, 애틋함 풍겨
성터 곳곳 왜구 감시하던 눈빛 서려 있어
부산서 진해 가던 길… 지금은 ‘차량 천국’
긴 세월에도 하늘·구름 자태 ‘그때 그대로’



금단곶보성. 이름만 보면 군사가 지키던 성이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우리 역사에 이런 성이 있었나 싶기도 하고 금은방 같기도 하고 중국집 같기도 하다. 하지만 2016년 부산박물관이 펴낸 <부산 성곽>에 엄연히 이름을 올렸다. 두꺼운 성벽이 연상되는 두꺼운 책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금지옥엽 귀하게 받든다. 성터에는 기념비를 세웠다.

성이 있던 자리는 성고개 고갯마루. 부산에서 진해로 가던 고갯길 어름이었다. 1510년 삼포왜란 때 진해 웅천성을 구원하려고 ‘금단곶에서 군사 100명 출동[발금단곶군일백(發金丹串軍一百)]’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에 나온다. 부산 고지도에도 금단곶이 나온다. 낙동강 한쪽 다소곳한 자태가 낯선 이 앞에서 수줍어했을 조선의 누이 ‘금단이’ 같다.

성고개는 지금 차가 다니는 대로다. 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넘쳐난다. 진해를 구원하려고 우르르 출동하는 군사의 후예 같다. 도로는 봉화산 남쪽 둘레길로 해서 녹산동 산양리와 송정동으로 이어진다. 봉화산 높이는 327m. 그다지 높진 않지만 뜨거운 기운으로 뭉쳤다. 한반도 서쪽 꿈틀대던 기운이 산기슭으로 내려오다 낙동강을 앞두고 여기서 맺혔다. 불길 내뿜던 봉수대까지 품었으니 그 기운, 그 열기는 누가 상상하든 어떻게 상상하든 그 두 배다.

봉화산 성고개 가는 시내버스는 단 하나. 하단에서 가덕도 선창을 오가는 58번 버스뿐이다. 한번 타려면 하늘의 별 따기다. 짧게는 40분, 길게는 1시간 10분 간격으로 다닌다. 왕복 6차선 널따란 대로를 홀로 다니는 시내버스는 성으로 내달리는 필마(匹馬) 같다. 그림자보다 빨리 달려 흙먼지라곤 일지 않는다. 필마에서 내린 곳은 ‘성고개’ 버스 정류장. 주막 같은 중국집 한 채, 사람이라곤 통 보이지 않는다.

“여기가 성고개 아닌교. 저리로 쭉 가면 용원 나오고 더 가면 진해요.” 어디로 가나. 잠시 방향을 잃었다가 도로 건너편 표지판에 눈길이 멈춘다. ‘금단곶보성’ 터를 알리는 표지판이다. 건널목 건너편에서 맞닥뜨린 주말농장 부부는 길 박사다. 놓쳤던 방향을 잡아준다. 바로 여기가 성고개라고 알려준다. 성정이 선선해 말만 잘하면 상추 한 소쿠리 선뜻 내줄 인상이다.

성고개는 산과 산 사이 고개. 정확하게 얘기하면 봉화산 이쪽 능선과 저쪽 능선이 접하는 구릉을 따라서 난 고갯길이다. 낙동강 녹산을 거쳐 진해 웅천으로 이어지는 길이라서 때로는 낙동강 강바람을, 때로는 진해 바닷바람을 등지거나 맞받으며 넘어가거나 넘어왔다. 꽃 피는 춘삼월만 넘진 않았을 터. 강바람, 바닷바람 살을 에는 엄동설한 그 모진 세월이 스민 고개가 여기 성고개다.

‘해와 달 딛고 간 흔적이 없고/별들이 잠자다 간 흔적도 없네/성채는 헐리어 풀숲에 묻히어서/나는 새 가는 구름/성(城)고개로만 불리운다네.’

성터에 세운 기념비는 문무 합작이다. 성채 돌로 쌓았지 싶은 기단과 큼지막한 자연석 빗돌이 장군의 기상이라면 기단에 새긴 낙동강 금물결 같은 시 한 편은 선비의 품격이다. 성은 얼마나 높고 두껍고 길었을까. 각각 15척(4.5m), 12척(3.6m), 2568척(770m)이다. 높이도 높이, 길이도 길이지만 3m가 넘는 두께라니! 누가 상상하든 어떻게 상상하든 하여튼 그 두 배다.

기념비 저 멀리 풍광도 상상 이상이다. 낙동강 강줄기며 그 너머 승학산, 그리고 하늘과 구름. 백 년 전, 천 년 전 고개를 넘던 이들도 여기서 땀 식히며 낙동강 강줄기며 그 너머 승학산, 그리고 하늘과 구름을 바라보았으리라. 지금 내가 하는 생각과 엇비슷한 생각을 하며 이 풍진 세상, 한시름 놓았으리라.

“옛날에도 이 길로 다녔고 지금도 이 길로 다녀요.” 부산에 녹산 산업단지가 들어서고 진해에 신항이 들어서면서 성고개는 옛날의 성고개가 아니었다. 몰라보게 반듯해지고 몰라보게 말끔해졌다. 새천년이 열리던 그 무렵이었다. 그러나 주말농장 부부 말대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 길이 그 길이고 그 길이 이 길이다. 저 멀리 보이는 하늘이며 구름이 그때 그대로이듯 길도 그때 그대로다.

그때 그대로.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세상에 그때 그대로인 것은 얼마나 소중한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가치는 얼마나 묵중한가. 고갯길 가장 높은 데서 바라보는 그때 그 하늘, 그때 그 구름. 그리고 그때 그 길. 버스는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참 징하다.

▶가는 길=도시철도 1호선 하단역에서 시내버스 58번을 타고 ‘성고개’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내친김에 봉화산 등산도 좋고 벚꽃 철이면 가로수를 따라 가덕도 선창까지 걸어도 좋다. 봉수대 등산로는 정류장 뒤쪽 산불감시 초소 옆으로 나 있다. 선창 가는 길은 차가 내달려 간담을 쓸어내리지만 진해 옛길이려니, 그런 마음으로 걷자. 버스 정류장 건널목을 건너면 기념비로 안내하는 이정표가 보인다. 





동길산 시인 dgs1116@hanmail.net



※이 기획은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도움을 받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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