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고결한 삶의 방식,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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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덕 소설가

지인들과의 단출한 모임에서 이육사 시인이 화제에 올랐다. 광복절 휴일에 대한 이야기 뒤끝이었다. 옆자리의 고교 교사가 작년에 학생들을 이끌고 안동의 이육사문학관에 견학을 다녀왔다고 했다. 그때 육사의 따님 이옥비 여사가 직접 문학관을 안내했다고 한다. 따님은 생전의 육사가 옷차림을 멋지게 꾸밀 줄 아는 멋쟁이였다고 회고했단다. 고향을 방문할 때 흰 양복에 백구두를 신었다는 소설 속 일화가 생각나서 그렇다고 맞장구쳤다.

마침 고은주의 장편소설 <그 남자 264>를 읽은 직후였다. 작년 여름에 사두고 며칠 전에야 완독한 소설이었다. 40세에 세상을 떠난 시인이 평생 17번 붙잡혀서 감옥에 갇혔고, 23세 때 대구형무소에서 받은 첫 번째 수인번호 264를 필명으로 삼았다는, 소설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글에 묘사된 안동의 선비 순례길과 퇴계 예던길을 꼭 한번 걷고 싶다고 덧붙였다. 갑자기 열변을 토하는 꼴이 되었는데 그때 건너편에 앉은 한 지인이 담담히 물었다.

독립운동가 삶·죽음 경외스러워
투쟁의지 신념의 뿌리는 무얼까

민족주의에 종교적 색채 더해져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구심 역할

이육사 경우, 선비정신이 뿌리
흔들림 없이 유지한 고결한 정신



“그런데 이육사 시인이 지금 우리 살아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죠?”

갑자기 말문이 막히고 입이 다물어졌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교과서적인 대답, 그러니까, 선조들의 독립운동으로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지인도 그런 식의 정답지를 몰랐던 건 아닐 테니까.

비교과 커리큘럼에 도움이 되겠다며 옆자리의 고교 교사가 소설에 관심을 보여서 한동안 둘 사이에 대화가 이어졌다. 널리 알려진 시 ‘청포도’와 옥사하기 전 감옥에서 마분지에 쓴 시 ‘광야’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윤동주 시인의 죽음이 그랬듯이 육사의 죽음 역시 석연치 않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서울에서 먼 북경의 일본 영사관 감옥까지 압송된 육사는 그곳에서 숨을 거뒀다.

독립운동가의 삶을 떠올릴 때마다 경외감과 함께 의문이 들곤 했다. 그들의 투쟁 의지와 신념의 뿌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연약한 육신을 가진 한 인간이 반복적으로 자행되는 끔찍한 고문과 고초를 이겨내려면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더구나 36년은 일관된 정신세계를 유지하기엔 너무나 긴 세월이다. 그러하기에 수많은 지식인과 문인들이 변절해서 일제에 동조하거나 침묵을 지켰다.

소설 <그 남자 264>에는 다음과 같은 육사의 육성이 나온다. “내 이름을 걸고, 목숨을 걸고 가야 할 이 길은 물론 고통스럽겠지만, 이 길로 가지 않으면 더욱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이 ‘종교 민족주의’ 성격을 띠었다는 건 학계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식민지 상황에서 종교가 민족공동체의 구심점이 되어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이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계 대표들로 이루어졌고, 이후 전개된 항일 투쟁에서도 종교인과 종교 조직이 연락망과 촉매 역할을 했다. 유관순 열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만해 한용운은 독립운동과 불교 개혁 운동을 동시에 이끌었다.

육사의 경우, 퇴계의 후손으로서 한학을 배우며 유가(儒家)의 가풍 속에서 성장한 선비정신이 정신적 뿌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의(義)를 삶의 중심에 놓고 좇는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선비정신이 아니라면, ‘천고千古’의 시간 속에서도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꿋꿋하게 기다린 도저한 희망을 설명할 수 없다. 일제에 빼앗긴 고향마을의 들판을 바라보며 썼다는 시, ‘넓을 광’이 아닌 ‘빌 광’의 ‘광야曠野’를 다시 한 번 정독한다. 고결한 삶의 방식을 흔들림 없이 선택하고 평생 유지했던 한 인간의 발자취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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