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삼의 타초경사(打草驚蛇)] 가족은 건드리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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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대 자유전공학부 특임교수

홍콩 신문 <빈과일보>의 발행인이 그저께 ‘국가보안법’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중국의 조급증이 심각하다는 뜻이다. 1970년대 한국 유신 정권 시절의 언론 탄압과 동아일보 백지 광고가 머리를 스친다. 그로부터 정권의 종말이 시작되었다. 이어지는 기사에 눈길이 멈춘다. ‘홍콩 경찰은 발행인의 두 아들과 임원 등 6명도 같은 혐의로 체포했다.’ 아, 선을 넘는구나, 싶었다. (발행인은 이틀 만에 풀려나긴 했다)

옛날 춘추시대 초나라에는 자식이 양을 훔친 아비를 당국에 고발하는 일이 있었다. 임금은 그를 ‘정직한 사람의 모범’이라며 의기양양하게 공자에게 소개했다. 공자는 유명한 답변을 남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다릅니다. 자식은 아비의 죄를 감춰주고, 아비는 자식의 죄를 감춰주는 가운데 정직이 있다고 여깁니다.”

홍콩 <빈과일보> 발행인 가족까지 체포
중국이 결국 선을 넘고 있구나
국가 이익보다 앞서는 게 가족의 가치
동서양에 두루 보이는 역사적 전통

여기서 공자는 이른바 실정법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부모 자식 관계마저 해체하는 사회질서와 국가안보는 과연 어떤 물건이냐는 질문이다. 이에 유교는 가족 보호를 국가 이익보다 선제적이고 근본적인 가치로 확정한다. 당연히 ‘부자유친(父子有親)’이 사람의 근본 도리가 된다. 사실 저 대화는 근대화 이후 공(公)과 사(私)의 경계, 법(法)과 예(禮)의 충돌, 동양의 윤리와 서구의 실정법 차이를 논하는 주된 메뉴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동양의 법가에서는 외려 이 대화를 껄끄러워했다는 점이다. 한비자는 이 대화를 인용하면서, 고발한 아들을 나라에서 처형했다고 비틀어 소개한다. 처벌의 이유는 ‘군주에게 정직했으나 아비에게는 패륜을 저질렀으니 패륜의 죄로써 벌한 것이다. 군주에게 정직한 신하가 아비에게는 패륜이 되는 것이다.’(<한비자>) 여기서 부모에게 복종하는 자식만이 나라에 충성한다는 충효론이 나오거니와, 여하튼 동양의 전통에서는 유가든 법가든 가족의 가치를 우선시해왔음을 알겠다.

엄혹한 우리 국가보안법의 불고지죄(간첩임을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은 자를 벌하는 것)에도 친족은 법 적용을 면제하거나 낮추는 조항을 두었다. 가족의 보호가 국가 안보보다 우선하는 전통이 지금껏 존재한다는 뜻이다. 홍콩 신문 발행인의 자식들을 연좌로 구속했다는 소식에 멈칫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세월 두고 수립된 전통을 거스르면 대개 끝이 좋지 않다.

서양도 다를 바 없는 듯하다. 영화 ‘대부’ 시리즈를 이어서 쭉 보니, 가족의 보전과 해체에 관한 이야기다. 이익을 위해서는 더러운 짓도 마다하지 않지만, 가족에까지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것이 ‘대부 1’의 주제라면, 조직을 배신한 가족(작은형과 자형)을 살해하면서 선을 넘는 것이 ‘대부 2’요, 결국 제 자식들조차 죽음으로 내몰고 주인공도 고독한 죽음을 맞는 것이 ‘대부 3’의 결말이다. 그러니까 선을 넘으면 안 된다. 자본주의도 가족을 해치면 소비 여력을 붕괴시켜 제 발밑을 무너뜨리고, 국가도 가족을 파괴하면 망조가 든다. 사람 없는 국가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생각하며 쓴다. 지난해 이즈음 (세월 참 빠르기도 하지) 시골의 마을 대항 축구 경기에서 골대 앞에 먼지가 부쩍 일고 우와~하는 함성과 함께 ‘골인~’이라며 동네 사람들이 운동장으로 몰려들던 것처럼, 그렇게 갑자기 그의 가족에게 검찰이 급습하였다. 언론들은 온통 흙먼지를 일으켰고 사람들은 누가 공을 차넣었는지, 어떻게 골이 들어갔는지 모르고 (모르는 듯) 함께 뛰어들었다. 그때 이미 검찰은 선을 넘었고, 언론들은 선을 무시했다. 최근 그는 “민사소송이든 형사소송이든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요되는 고단한 일이다”라면서도 “서두르지 않고 지치지 않으면서 하나하나 따박따박 진행할 것이다”라며 소송을 시작했다. (사전은 ‘따박따박’을 ‘아장아장’의 전라도 사투리라고 하는데 경상도에서는 ‘낱낱이, 꼼꼼하게’라는 뜻으로 쓴다)

복수라고? 복수와 증오는 공자로부터 계승된 법문화인 터. 공직은 책임지는 자리요, 자유는 의무가 따르기 때문이다. 다만 이직보원(以直報怨)이라,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말되 그렇다고 어물어물 덕으로 눙치지도 말고 합당한 이치로써 보답하라는 것이 공자의 복수론이다. 이를 이어 ‘증오와 수치심이 정의 실현의 실마리’라고 이른 것은 또 맹자다. 스스로 시비를 가리지 않고 조직의 하수인이 되어 패거리 짓을 행하는 것은 공직자의 할 짓도 아니요, 언론인이라는 이름을 쓸 수도 없다.

여하튼 가족은 건드리지 말자. 선을 넘은 공직자는 책임을 지고, 자유의 한계를 넘은 기자들은 벌을 받자. 프라이버시 보호니 뭐니, 서양식으로 말할 것 없이 정당한 증오와 합당한 복수가 정의사회의 기초임은 이 땅에 유래가 있는 오랜 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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