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인문학 기행] 14 오스트리아 빈 오페라하우스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두 건축가 비극적 사연 품은 유럽 오페라 전당


오스트리아 빈을 대표하는 공연장이자 관광명소인 오페라하우스 ‘슈타츠오퍼’가 화려한 야경으로 빛나고 있다.오페라하우스 무대 전경(왼쪽)과 케른트너 거리 쪽에 자리 잡은 조각상.

유럽의 ‘3대 오페라 하우스’로 손꼽히는 곳이 있다. 오스트리아 빈의 슈타츠오퍼, 프랑스 파리의 오페라 가르니에,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이다. 이 가운데 슈타츠오퍼 건립에는 두 건축가의 아픈 사연이 담겨 있다.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빈 지켜 온 성벽 헐고 지은 공공 건축물
뉠·시카르드스부르크 의기투합 공모
설계안 1등 차지했지만 황제·여론 비난
뉠 극단적 선택, 동료도 병 걸려 사망
1869년 5월 완공 ‘돈 조반니’ 첫 공연
매년 오페라 등 350여 회 공연 명소

■빈 성벽을 허물다







‘빈을 둘러싼 성벽을 모두 허물고 해자를 모두 메우기로 했다. 도시를 더 팽창시키기 위해 성벽을 허문 자리에 새로운 도로를 만들고, 공공 건축물을 세우도록 하겠다.’

1857년 합스부르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가 칙령을 발표했다. 오랫동안 빈을 외부의 침략에서 보호해온 성벽을 없애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빈 성벽은 13세기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처드를 석방하면서 받은 몸값으로 만들어 500년 동안이나 빈을 지켜왔다. 오스만튀르크의 ‘빈 포위’ 때 빈을 공고히 지킨 일등 공신이었다.

하지만 17세기 들어 빈 인구가 늘어나고 외곽 지역에 주거지역이 팽창하는 바람에 성벽은 도시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없앤 성벽은 빈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그곳에 새로 낸 길은 빈을 한 바퀴 도는 링(원형) 같았다. 그래서 그 도로를 링 슈트라세(링 순환도로)라고 부르게 됐다.



■오페라하우스 공모전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링 슈트라세 일대에 공공 건축물도 건설하라고 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위용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건물들이었다. 내무성은 먼저 오페라하우스를 짓기로 하고 설계 공모전을 열었다. 당시 유럽 최고 제국이었던 합스부르크에서 실시하는 공모전이었던 만큼 유럽 각국의 유명 건축가들이 대부분 참가했다.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우리도 한 번 참여해보도록 하세. 당선된다면 우리 경력에 큰 힘이 될 거야.”

“좋아. 우리 둘의 호흡이라면 충분히 당선되고도 남는 작품을 만들 수 있어.”

당시 40대 후반의 오스트리아 출신 건축가 에두아르드 반 데르 뉠도 공모전에 작품을 냈다. 그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아우구스트 시카르드 폰 시카르드스부르크와 함께 공모전에 참가했다. 한 살 차이인 두 사람은 오랫동안 같이 일을 해 온 사이였다. 시카르드스부르크는 실용적, 기술적인 측면을 담당했다. 뉠은 장식 분야를 맡았다. 빈에서는 호흡이 잘 맞는 건축가들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요제프 황제의 비난

두 사람의 설계안은 1등을 차지했다. 전문가들에게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대중은 물론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생각은 달랐다. 특히 황제는 노골적으로 힐난을 쏟아냈다.

“어떻게 이런 설계안을 당선작으로 정했지? 두 건축가가 예술적 심미안을 갖고 있기는 한 사람들인가? 길 건너편에 있는 하인리히스호프는 안 보이나? 오페라하우스가 들어섰을 때 부끄러워서 어떻게 하려는 건지….”

하인리히스호프는 오페라하우스가 들어설 예정인 부지 맞은편에 있던 개인 저택이었다. 정말 훌륭한 건물이어서 빈을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아름다움’을 가졌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였다. 하인리히스호프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무너져 사라졌고, 지금은 그 자리에 오페른링호프라는 건물이 서 있다.

신문도 연일 두 사람의 설계안을 물고 늘어졌다. ‘시작부터 절반의 실패’라는 게 언론의 지적이었다. 게다가 링 슈트라세는 여러 가지 이유로 1m 높아졌다. 결과적으로 오페라하우스는 1m 낮아지게 된 셈이었다. 한 신문은 오페라하우스를 ‘가라앉은 보물상자’라고 조롱했다.

다른 신문은 한창 건설 중이던 오페라하우스를 ‘건축계의 쾨니히그라츠’라고 놀렸다. 오페라하우스 공사가 진행되고 있던 1866년 쾨니히그라츠에서 오스트리아-프러시아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오스트리아는 이 전투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두 건축가의 비극

뉠은 너무 괴로웠다. 괜히 공모전에 뛰어들어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명성이 한꺼번에 무너져버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앞으로 건축계에 발을 붙이기도 어렵게 됐다는 불안감이 생겼다. 힘들어하던 뉠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는 오페라하우스 공사를 하고 있던 1868년 4월 4일 집에서 목을 맸다.

뉠이 자살했다는 소식은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전해졌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소심한 사람이로군. 그런 일을 갖고 자살까지 하다니.”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황제는 뉠의 자살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후 모든 천재 예술가들을 평가할 때에는 절대로 비판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늘 이렇게 평가했다.

“정말 훌륭한 작품이군. 마음에 쏙 들어.”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시카르드스부르크는 병에 걸리고 말았다. 당시에는 살아나기 힘든 불치병에 가까웠던 결핵이었다. 오페라하우스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던 터에 평생을 같이 일해 온 동료가 자살했다는 소식은 그의 건강을 해치기에 충분했다. 그는 결국 뉠이 자살하고 10주 뒤 세상을 뜨고 말았다.

두 사람이 모두 죽고 난 뒤 오페라하우스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는 쏙 들어갔다. 이후로는 아무도 오페라하우스 설계를 두고 입을 대지 않았다.

오페라하우스 공사는 계속 진행됐다. 물론 두 사람의 설계대로였다. 오페라하우스는 1869년 5월 25일 완공됐다. 개장 첫 공연도 그날 열렸다. 초연작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였다. 당시 공연에는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물론, 엘리자베트 황후도 참석했다.

뉠은 빈 중앙묘지에 묻혔다. 1875년 빈 파보리텐 지구에는 반-데르-뉠 거리가 생겼다. 빈 시청이 그의 업적을 기념해 거리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죽은 후이지만 그의 명예가 조금이나마 회복된 셈이었다.

비엔나 슈타츠오퍼라고 불리는 빈 오페라하우스는 지난해 완공 150주년을 맞았다. 오늘날 전 세계에 있는 오페라하우스 중에서 가장 공연이 많은 곳 중 하나다. 매년 오페라 50~60여 작품과 발레 10여 작품 등 모두 350여 회 공연이 열린다. 매주 요일마다 다른 오페라가 공연되는 일이 흔하다. 연간 총예산은 1억 유로 안팎이며, 절반가량은 국가에서 지원한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빈 성벽 주변 명소 현지 주택가 통과

유럽의 여느 도시에 비해 빈에는 지하철과 함께 트램이 교통수단으로 매우 발달해 있다. 도심과 외곽을 많은 트램이 달린다. 빈의 트램은 S-반이라고 부른다. 트램 노선을 잘 알면 지하철을 타지 않고 빈 풍경을 즐기면서 이동할 수 있다.

가장 추천할 만한 트램은 1번이다. 주요 노선이 ‘링 슈트라세’를 돈다. 링 슈트라세는 과거 빈의 성벽이 세워져 있던 곳이기 때문에 이곳을 따라 온갖 명소가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1번 트램을 타고 끝에서 끝까지 오가면, 빈에서 유명한 관광지를 골고루 둘러볼 수 있다.

오페라하우스 앞의 케른트너 링 정류장에서 1번 트램을 타면 왕궁 정원, 국립극장, 국회의사당, 시청사인 라트하우스, 빈 대학교, 베토벤 기념관, 보티프 성당을 둘러볼 수 있다. 1번 트램은 빈 운하를 따라 달리면서 이색 건물로 유명한 훈데르트 미술관, 훈데르트 바서의 집 등으로 관광객을 데려간다. 빈 주민들이 사는 주택가를 지나기 때문에 현지인들이 사는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종점은 운하 건너편에 있는 공원이다. 1번 트램은 푸른 숲과 체육시설이 밀집해 있는 프라터 공원에서 엔진을 끈다. 빈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다는 매우 넓은 공원이어서 여행 중이라도 여유를 갖고 한 번 둘러볼 만한 곳이다. 남태우 선임기자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