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순교 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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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자’ 피에르. 11세기 말 프랑스의 수도자였다. 은자(隱者)는 고대 기독교에서 고독하게 수행하던 사람을 일컫는 호칭이다. 피에르에게 그런 칭호가 가당한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지금까지 그는 은자로 불린다. 그는 수염을 길게 길렀고, 삐쩍 말라서 앙상했고, 늘 누추한 옷차림에 맨발이었다.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 전쟁을 선포하기 전 피에르를 만났다고 한다. 이후 그는 곳곳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십자군 원정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권력에 빌붙어 민중을 선동한 것이다. 하지만 피에르의 카리스마 넘치는 열변은 많은 사람을 흥분시켰고 감동케 했다.

그는 대중을 향해 순교하자고 외쳤다. 자신이 이슬람과 맞서 싸우라는 신의 편지를 갖고 있고, 따라서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신의 뜻이며, 전장에서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주장했다. 마귀 들리거나 병에 걸린 이들이 피에르를 만나면 금세 낫는다는 소문까지 퍼지면서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피에르를 추종하던 절대다수는 빈민과 농민이었는데, 그들은 곧 민중 십자군으로 불렸다. 무장은커녕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하고 식량 보급 계획도 없이 전장으로 향하던 그들은 가는 곳마다 약탈을 일삼아 공분을 일으켰으며, 결국 전투다운 전투 한 번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궤멸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을 처참한 죽음으로 내몬 피에르 자신은 그들과 함께 순교하지 않고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기독교에선 성 스테파노를 시작으로 조선 후기 김범우에 이르기까지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이들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박해를 받고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였을 뿐, 그 죽음으로 남을 선동하거나 이웃에게 해를 끼치려 하지는 않았다.

서울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가 지난 2일 선지자를 자처하며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순교할 각오가 돼 있다”고 밝혔다. ‘각오’라는 모호한 단어를 사용했지만, 어쨌든 순교라는 메시지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전한 것이다. 전 목사가 말하는 순교가 기독교 역사 속 순교 사례들에 부합하는지는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참, 십자군 전쟁의 배경으로 당시 금보다 비쌌다는 후추 쟁탈이 거론되기도 한다. 그런데 피에르가 후추를 광적으로 좋아했다는 설이 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가 순교 운운하며 민중을 전장으로 이끈 게 혹 후추 때문은 아니었을까.

임광명 논설위원 kmy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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