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나는 너의 엄마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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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라이프부 레저팀장

회사 옆 핸드폰가게 총각이 웃으며 다가온다. 지나가던 나를 붙잡고 “어머니! 공짜 선물 1개 받아가세요!”라고 큰 소리로 말한다. 순간 화가 나서 그 총각 손을 뿌리치고 지나갔다. 이 사람은 뭘 잘못했을까.

이 총각은 일정 이상의 나이가 있는 여자들은 공짜라면 무조건 좋아할 것이라는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나에게 다가왔다. 거기에 다짜고짜 ‘어머니’라고 불렀다는 점이 더 화나게 했다. 솔직히 나는 그 자리에서 “누가 너 엄마냐. 나는 당신같은 아들을 둔 적이 없다”라고 항의하려다가 겨우 참았다.


중년 여성은 공짜 좋아한다는 편견
호객 행위 당할 때마다 불쾌감 느껴
요즘 공연계 주요 관객은 중년 여성
개성과 욕구 발산하며 살아가는 시대

‘어머니’라는 호칭 자체가 싫다는 건 아니다. 사실 세상에서 ‘어머니’라는 단어 이상으로 울컥한 감동을 주는 게 뭐가 있을까 싶다. 특히 내 부모뿐만 아니라 친구의 부모까지도 스스럼없이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건 한국사회의 정스런 모습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그러나 감동적인 단어 ‘어머니’가 마케팅의 영역으로 들어가더니 나이가 있어 보이는 여성들은 무조건 누군가의 어머니가 돼 버렸다. 심지어 많은 여성들이 비혼의 삶을 선택하고 화려한 싱글로 살아가는 2020년에도 말이다.

물론 판매자들은 어머니라는 단어가 가진 정감을 이용해 고객에게 친근하게 다가서겠다는 전략이지만, 많은 중년 여성들은 일명 ‘어머니 호객전략’에 불만이 있다는 것도 알아주면 좋겠다.

과거 어머니세대와 달리 현재 중년 여성들은 대부분 학력 수준이 높고 뚜렷한 개성과 취향을 가지고 있다. 그 취향과 개성이 나이가 든다고, 결혼을 했다고, 아이를 낳았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결혼을 하며 내 가정에 대한 애정이 생겼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 역시 여전히 큰 영역을 차지한다. 요즘 공연계 주요 고객이 40-50대 여성들이고, 지갑을 열어 자신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에게 고가의 선물공세를 하는 팬들은 정작 10대가 아니라 중년여성들로 이미 변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회 전반적으로 중년 여성에 대한 편견이 여전히 존재하는 걸 느끼는 순간이 있다.

집 근처 대형마트를 가면 나는 어김없이 1층 학습지 매대 직원에게 붙잡힌다. 역시나 다짜고짜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시작해 자녀를 위해 꼭 사야할 것들이라며 구입을 강요당한다. 마치 최우선적인 관심과 소비는 오직 자녀라는 결론을 낸 것 같은 분위기이다. 정작 내가 관심있는 건 학습지 매대 뒤 액세서리 가게의 신상 귀걸이, 팔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왜 안할까. 나를 꾸미기 위해 돈을 쓸 수 있다는 뜻이다.

중년여성들은 자기의 취향은 거세당한채 오직 아이를 위해서만 지갑을 여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그 태도가 불쾌하다. 과거 ‘아줌마’로 대표되던 중년 여성에 대한 편견이 이젠 사라지는가 했더니 대신 어머니 마케팅으로 남아있는 것 같아 참 섭섭하다.

핸드폰가게 일화를 친구에게 이야기하니 그 친구가 일격을 날린다. “너 뭐 입고 있었어? 화장 안했지? 그런 일 안 당하려면 풀 메이크업에 몸에 딱 붙는 바지, 혹은 허리를 조르는 원피스를 입어야지.”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어떻게 꾸미고 가느냐에 따라 백화점 점원의 응대가 달라지는 경험을 많은 이들이 갖고 있다. 겉을 보고 판단하지 말자더만 옷차림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는 건 한국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언론재단의 연수자로 세계패션의 중심, 미국 뉴욕에서 1년간 살았는데 정작 뉴욕 엄마들의 패션은 편안함 그 자체였다. 매일 아침 아이학교에서 만났던 엄마들은 편한 운동화, 레깅스, 티셔츠로 수수하게 입고 다녔다. 학부모모임에서 기죽지 않기 위해 무리해서 명품가방을 마련한다는 한국 엄마들과 달리 미국의 부모들은 학교 행사조차 아침에 만났던 복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년의 여성은 호칭으로, 옷차림으로 매일 차별을 당하고 있다. 물론 일잘하는 회사 대표로, 주말에는 취미를 즐기는 멋진 남자로 사는 싱글의 남자 선배 역시 가끔 “아버님” 호칭 폭격을 당한다고 푸념한다.

“선생님” “고객님” 같이 나이와 관계없이 사용할 수 있는 말이 많은데 왜 굳이 중년의 여성은 무조건 “어머님”, 남성은 “아버님”으로 호칭을 통일시킬까.

그날 핸드폰가게 총각이 “고객님! 신형 핸드폰 나왔어요. 설명 좀 들어보세요”라고 말을 건넸다면, 아마 나는 실제로 구입을 고려 중인 S사나 A사의 최신형 핸드폰을 구매했을 것 같다. 그 총각은 그 날 고가의 제품을 팔 수 있는 기회를 날렸다.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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