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안치된 합스부르크 황족의 시신과 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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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인문학 기행] 15. 오스트리아 빈 황족의 무덤

오스트리아 빈 카푸치너 교회의 카이저 그루프트에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프란츠 슈테판 황제와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의 관이 놓여 있다.

유럽에서는 어느 나라든 황제, 황후를 포함해 황족의 장례식은 중요한 행사였다. 근세 유럽에서 가장 강력했던 황가였고 1438~174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독식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족도 마찬가지였다.

오스트리아에서는 황족이 죽으면 시신, 심장, 내장을 제각각 떼어내 따로 모셨다. 시신은 카푸치너 교회에 있는 카푸치너(카이저) 그루프트에 안치했다. 심장은 호프부르크 궁전 인근 아우구스티너 교회의 로레토 예배당 뒤에 있는 헤르츠그루프트에 모셨다. 내장은 성 슈테판 대성당에 보냈다.

카푸치너 교회 지하묘지는 시신 무덤
마티아스 황제 ‘부부 묘지’로 시작
황제 12명·황후 18명 등 143명 묻혀
아우구스티너 교회에 54개 심장
페르디난드 유언 따라 내장 따로 보관
항아리에 담아 성 슈테판 대성당에 

성 슈테판 대성당 지하묘지 입구(위 사진)와 카푸치너 교회 예배당 전경.

■황가의 안식처 카푸치너 교회

합스부르크 황족이 카푸치너 교회에 묻히려면 아주 이색적인 의식을 거쳐야 한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2011년 7월 16일 이곳에 묻힌 오토 대공의 경우를 스토리로 구성해본다.

‘오토 대공의 관을 실은 화려한 마차가 케른트너 거리를 거쳐 카푸치너 교회 앞에 도착한다. 마차에서 한 사내가 먼저 내린다. 그는 호프부르크 왕궁의 시종장이다. 카푸치너 교회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시종장은 은으로 만든 문고리를 잡고 문을 세 번 두들긴다.

교회 안의 카푸치너 수도사는 문을 여는 대신 질문을 던진다. 물론 그는 오토 대공의 시신이 여기로 온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거기 누구신가요?”

시종장은 목을 가다듬은 뒤 대답한다.

“저는 오토 대공입니다. 오스트리아 황제이며, 헝가리 국왕이며, 보헤미아·달마티아·슬라보니아·갈리시아·로도메리아 국왕이며, 일리리아 국왕입니다. 또 예루살렘 국왕이며, 오스트리아 대공이며, 투스카니와 크라쿠프 대공이며, 로레인·잘츠부르크·린티아 대공이며, 카르니올라·부코비나 대공입니다. 트란실베이니아 태공이며, 모라비아 후작이며, 위 실레지아와 아래 실레지아 공작이며, 모데나·파르마·피아첸차·과스탈라 공작이며, 아우슈비츠 공작입니다.(이하 생략)….”

시공장이 한참이나 오토 대공이 갖고 있는 작위를 설명했지만 수도사는 문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시종장은 문을 다시 두들긴다. 수도사는 다시 묻는다.

“거기 누구신가요?”

“저는 오토 대공입니다. 황제이며 왕입니다.”

수도사는 이번에도 문을 열지 않는다.

“저는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시종장은 다시 문을 두들긴다. 벌써 세 번째다. 수도사는 다시 질문한다.

“거기 누구신가요?”

시종장은 이번에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한다.

“저는 오토 대공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죽어야 할 인간이며 하느님의 죄인입니다.”

수도사는 이번에는 이렇게 말한다.

“들어오시오.”

수도사는 문을 연다. 이제야 관은 안으로 들어간다. 교회에는 카푸치너 수도사들이 양쪽으로 길게 줄지어 서 있다. 예배당 안에서 장례 연설이 이어진다. 연설이 끝난 뒤 관은 지하묘지로 운반된다. 빈 시내 곳곳에서 대포 스물한 발이 발사된다.’

당초 합스부르크 황족의 지하묘지는 성 슈테판 대성당이었다. 카푸치너 교회와 지하묘지가 세워진 이후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황족은 카푸치너 교회에서 안식처를 찾는 게 관례가 됐다. 카푸치너 교회의 지하묘지는 1618년 숨진 안나 황후와 그 다음 해에 눈을 감은 그의 남편 마티아스 황제의 시신을 모시기 위해 지었다. 처음에는 ‘부부 지하묘지’였던 셈이다.

카푸치너 그루프트에는 역대 황제 12명, 황후 18명과 다른 황족 113명이 묻혀 있다. 카푸치너 그루프트는 ‘카푸친 수도회의 지하묘지’는 뜻이다. 가장 눈에 띄는 관은 프란츠 슈테판 황제와 ‘오스트리아의 여걸’ 마리아 테레지아의 시신을 담은 관이다. 두 사람은 지하묘지의 맨 위에 누워 있다. 프란츠 조제프 황제의 관은 유일하게 돌로 만들어졌다. 곁에는 그의 부인 엘리자베트와 자살한 아들 루돌프의 관이 놓여 있다.

■아우구스티너 교회에 모신 심장

오스트리아의 왕자 페르디난드 3세는 첫 결혼에서 아들 페르디난드 4세를 얻었다. 신생아 사망률이 50%에도 못 미치던 시절이어서 다들 그가 출생 초창기를 잘 넘길지 걱정했다. 페르디난드 4세는 사람들의 우려를 딛고 어떤 아기보다도 건강하게 잘 자랐다. 당시 황제였던 노령의 할아버지 페르디난드 2세는 매우 기뻐했다.

“대를 이을 건강한 손자를 얻었구먼!”

페르디난드 3세는 아들이 태어나고 4년 뒤에 제위에 올랐다. 그는 아들이 열세 살일 때 보헤미아 국왕 자리를 선물로 주었다. 이듬해에는 헝가리 국왕은 물론 오스트리아 대공 자리도 물려주었다.

“아들이 누구보다 건강해서 제위를 물려받는 데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 같군.”

페르디난드 3세는 손자를 보기 위해 아들을 결혼시키기로 했다. 며느리는 같은 합스부르크 황족인 스페인 펠리페 4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였다. 그런데 결혼식을 두어 달 남겨두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페르디난드 4세가 천연두에 걸린 것이었다. 당시에는 치유 불가능한 질병이었다.

페르디난드 4세는 침대에 누워 침통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에게 유언을 남겼다.

“아버지, 제가 죽으면 시신은 카푸치너 교회에 묻고, 내장은 성 슈테판 대성당에 보관해 주세요. 심장은 떼어내 아우구스티너 교회 안에 있는 성모 마리아 발밑에 묻어주세요.”

아우구스티너 교회는 황제가 살던 호프부르크 궁전 인근에 있는 교회다. 1327년 프레데릭 공작이 아우구스티너 수도회를 위해 건립한 곳이다. 프란츠 조제프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후가 결혼식을 올린 곳도 여기였다. 이후 많은 왕자, 공주가 여기서 결혼했다.

페르디난드 4세는 1654년 7월 9일 결국 눈을 감았다. 그의 시신은 그날 바로 방부 처리했다. 심장은 금속 포도주잔에 담겨 그가 숨진 침대에 놓였다가 다음 날 오전 9시 아우구스티너 교회로 옮겨졌다. 그의 심장은 특수 항아리에 담겨 ‘심장의 방’이라는 뜻인 헤르츠그루프트에 안치됐다. 아우구스티너 교회의 로레토 예배당이 바로 그곳이다.

이후 합스부르크 황가에서는 황족이 죽으면 심장을 떼어내 페르디난드 황제의 심장 곁에 따로 묻는 관습이 생겼다. 그곳에 안치된 심장은 모두 54개다.



■내장은 성 슈테판 대성당에

사람들은 고대 이집트 때부터 시신을 부패하지 않게 오래 보존하려면 내장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게 미라였다.

합스부르크 황가에서는 원래 떼어낸 내장을 담은 용기를 관 한쪽에 놓아두는 게 관례였다. 페르디난드 4세가 죽으면서 유언을 남긴 이후 내장 용기는 시신을 담은 관과 다른 장소에 보관하게 됐다. 그곳이 바로 성 슈테판 대성당이었다. 페르디난드 4세의 동생인 레오폴드 1세 황제도 죽었을 때 형의 관례를 따랐다.

“나도 형처럼 시신, 심장, 내장을 따로 떼어내 보관해 주시오.”

그의 내장을 담은 항아리는 성 슈테판 대성당의 듀칼 지하묘지에 보관하게 됐다. 이런 식으로 해서 시신, 심장, 내장을 따로 보관한 황족은 모두 33명이나 된다.

내장 항아리가 해마다 늘어나는 바람에 1754년 무렵에는 성 슈테판 대성당의 지하묘지 공간이 모자라게 됐다. 황제는 원형 공간을 새로 만들어 지하묘지를 넓히게 했다.

카푸치너 교회에 묻히지 않은 황제가 1명 있었다.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황제였던 카를로스였다. 그의 유언 때문이었다.

“나는 아내 지타와 함께 마데이라에 있는 몬테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 안식하게 해 주시오. 심장은 이탈리아에 있는 무리 사원의 로레토 예배당에 안치하면 좋겠군요.”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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