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도서정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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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른 상품과 달리 취급하는 예외적 제도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책을 일반 상품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의지다. 시장 논리를 다소 굽혀서라도 책이 당장의 수익 논리에만 좌우될 수 없는 문화적 재산임을 확실히 하겠다는 의지다.” 1981년 프랑스 미테랑 정부 시절 쟈크 랑 문화부 장관이 의회에서 한 연설이다. 당시 랑 장관은 전국 어디서나 같은 가격으로 책을 판매해 국민의 독서 평등권을 확보하겠다며 도서정가제 법을 만들었다. 그래서 ‘랑법’이라고도 한다.

프랑스는 1924년 세계에서 제일 먼저 도서정가제를 도입했다. 이는 서점들이 출판사가 정한 도서 가격보다 싸게 팔 수 없도록 정부가 강제하는 제도. 자본력을 앞세운 대형 서점들의 과열된 책값 인하 경쟁으로 소규모 서점들이 도산하거나 학술과 문화예술 같은 인기가 적은 분야의 서적 출간이 위축되는 걸 막기 위해 서점들이 도서 정가대로 팔도록 한 조치다. 프랑스는 문화강국답게 오래전부터 책을 상품이 아닌 문화자산으로 인식해 온 것이다.

프랑스 정부가 동네 서점과 소형 출판사를 더욱 철저히 보호할 목적으로 기존 도서정가제를 보강한 게 랑법이다. 대형 서점들 간 경쟁이 심해져 작은 서점들이 고사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랑법 시행으로 프랑스는 균형적인 전국 서적 유통망 유지와 출판의 다양성 보장을 이뤄 내 세계에서 가장 안정적인 도서시장 생태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4년 프랑스는 작은 서점들을 위해 온라인 서점의 할인 판매와 무료 배송을 금지한 보다 강력한 법을 제정했다. 속칭 ‘반(反)아마존법’이다. 글로벌 기업 아마존 등 대형 온라인 서점의 등장으로 다시 도서시장이 흔들릴 때였다. 프랑스 동네 책방들은 강화된 법 덕분에 불공정 경쟁과 출혈 경영에 시달리지 않는다. 일부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유지하며 문화예술의 나라 프랑스를 살찌우는 문화 인프라의 하나로 여겨질 정도다.

우리나라도 2003년부터 같은 취지로 도서정가제를 시행 중이다. 2014년 개정된 출판문화산업진흥법에 따른 현행 제도는 도서 정가의 15% 안에서만 할인할 수 있게 규제하고 있다. 하지만 부산을 비롯한 전국 영세 서점들과 중소 출판업계가 오는 11월 20일까지로 예정된 제도 개정에 크게 반발한다. 정부의 도서정가제 후퇴 움직임을 우려해서다. 동네 서점에 들러 내 고장 출판사가 펴낸 좋은 책을 골라 사 읽는다면, 코로나19 사태의 비대면 시대나 독서의 계절에 어울리고 지역 경제 및 문화를 지원하는 의미도 클 듯하다.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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