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모룡 칼럼] 근시사회의 민낯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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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오랫동안 소각장이라고 멀리한 환경공단 옆길을 찾게 된 것은 순전히 코로나19의 상황 때문이다. 송정 옛길의 초입에 늘어선 메타세쿼이아가 주는 매력에 이끌리고 와우산 언덕바지를 가로지르는 숲 산책로에 이르러 인적이 적어서 편안한 느낌을 얻는다. 살아 있는 화석식물인 메타세쿼이아 가로를 지나면 왠지 석탄 냄새가 나는 듯하다. 지금의 팬데믹이 화석연료 사용이 원인이 된 기후변화와 연관이 있다고 하니 곧게 뻗어 상승하는 위용을 자랑하는 나무를 보면서 심사가 뒤틀리기도 한다. 소각장 쓰레기 더미에서 간간이 불어오는 썩는 냄새며 재난 상황에서 자기 보전을 위해 숲길로 뒷걸음치는 자신에 대한 자의식 등이 겹쳐 썩 유쾌하진 않다.

코로나19, 지역화로 극복 가능
이웃 배려하고 함께 살아가는
민주적 과정 활성화 장치 절실

위기에 드러난 우리 사회 민낯
구체적 삶을 살피는 자세 통해
불평등·노동 재평가로 나가길



코로나19의 상황이 지속되면서 생긴 습관 가운데 하나가 도심에서 외떨어진 길을 찾아 걷는 일이다. 마스크의 구속에서 놓여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얄팍한 계산이 작동한 탓이 아닐까. 두루 알다시피 우리 사회에서 마스크가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기호가 된 지도 오래다. 이는 자기를 보존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사회적 매개가 되었다. 권력과 권위가 강요하는 강제가 아니며 비상사태에서 불가피한 윤리이자 정의이다. 숲길에서 얻은 마스크로부터의 해방은 곧 다른 사람들의 등장으로 끝나고 만다. 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보이면 다시 마스크를 끼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 마스크를 던져 버려도 좋을 날이 오리라 믿는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사는 삶이 ‘뉴노멀’은 아닐 터이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그저 피하고 견디며 끝나기만 기다려도 좋은 상황인가. 아니면 변화의 기회로 삼아 새로운 정책과 제도를 찾아가야 하는가. 당연히 후자에 있음을 모르는 이가 없을 터인데 왠지 내남없이 사람들이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듯하고 정치인들이나 국가기구가 내어놓은 방안들이 단기 처방이나 임시 부양책으로 비치기만 한다. 팬데믹으로 드러난 문제가 어디 한두 가지인가. 그 가운데 무엇보다 경제 위기가 초래한 생존의 불평등이 두드러지지 않았는가. 운송, 청소, 판매, 계산, 돌봄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생각할 수 있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이 입는 피해도 만만치 않을 터인데 임시적인 재난지원의 형태보다 더 나아가는 정책과 제도가 요청된다. 아울러 재난의 공포는 혐오와 차별이라는 윤리 위기를 만연하게 하는바, 종족, 세대, 젠더, 지역 간에 발생하는 혐오와 차별을 금지하는 법의 제정이 요긴하다. 또한 공공의료의 강화와 지역적이고 분권적인 정책을 더 확대해야 한다. 팬데믹은 세계화가 아니라 지역화를 요청한다. 이웃을 배려하고 함께 살아가는, 민주적 과정을 활성화하는 장치들을 필요충분할 만치 고안할 필요가 있다.

이즈음 미국의 저널리스트 폴 로버츠가 말한 ‘근시사회’라는 개념이 떠오른다. 단기적 목표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장기 투자나 장기적 헌신, 영속성에는 매우 적대적이어서 지속성 있는 사회적 가치나 경제적 가치를 만들지 못하게 된 사회를 의미한다. 투기와 이기심, 욕망과 충동이 신중함이나 화합, 미래에 대한 염려를 대신하는 근시안적인 사회가 되었다는 진단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기후변화와 같은 문제가 풀릴 까닭이 없다. 물론 그가 단기 이익에 바탕한 사회경제 모델로 내세운 나라는 미국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 있는 자기중심적 경제는 한국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참조 사항으로 보아도 될 듯하다. 시장을 통하여 자아를 창출하려는 욕구의 과잉은 아파트 현상 등으로 이미 잘 드러난 사실이다. 이것은 또한 자기중심적 문화 규범을 유발하면서 사회적인 것을 약화하고, 타인의 견해를 용인하지 않는 정파적 적대를 강화한다. 근시사회에서 중간영역은 협애하기만 하다.

우리가 온전하게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이전과 전혀 다른 이후의 시대를 살 수도 없다. 삶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섞여 흘러간다. 가령 비대면을 뜻하는 ‘언택트’라는 신조어가 마치 하나의 흐름인 양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여전히 사회는 대면(컨택트)에 의해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그 무엇보다 코로나19로 인한 우리 사회의 민낯이 돌올하다. 자기 잇속을 챙기기에 급급한 개인과 집단의 일그러진 모습을 본다. 사회를 이끌고 헌신해야 할 전문가 집단이 더 이기적이다. 그림자처럼 가려진 채 우리 사회를 뒷받침하는 이들은 현장 노동자들이다. 코로나19라는 비상사태가 엄중한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시민의 삶은 매우 구체적이다. 4차산업과 같은 환상을 말하기보다 불평등을 치유하고 물질 노동, 재생산 노동을 재평가하는 일들을 중심의제로 삼아야 한다. 접촉을 회피하고 안전과 자유를 생각하며 숲길을 배회하는 나의 산책이 자기중심적 도피가 되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데, 이는 어쩌면 환경공단 둘레 메타세쿼이아가 나에게 준 메시지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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