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태풍이 원전에 남긴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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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준 부산대 기계공학부 교수·전 원자력안전위원

동남권을 강타한 태풍이 남긴 상처가 크다. 지난 9월 3일 제9호 태풍 ‘마이삭’의 영향으로 신고리 1·2호기와 고리 3·4호기가 정지되었다. 이어서 이들 원전에서 비상 디젤발전기가 자동기동 되었다. 영구정지된 고리 1호기와 예방정비 중인 고리 2호기의 비상 발전기도 작동되었다.

9월 7일에는 제10호 태풍 ‘하이선’이 월성 2·3호기의 발전정지를 유발했다. 전례 없는 6개 원전(원전 6기) 발전정지로 인해 안전에 관한 우려가 크다.

원전은 원자력을 이용하여 전기를 만드는 공장이다. 일반 공장과 마찬가지로 원전에도 전기가 꼭 있어야 한다. 원전의 핵연료는 정상운전 중이나 정지했을 때에도 항상 냉각되어야 하는데, 냉각수 공급에 전기로 구동하는 펌프를 쓴다. 그래서 외부 전기를 받는 수전 설비가 필수적이다. 생산한 전기를 외부로 보내는 송전 설비도 당연히 있어야 한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바로 송수전 설비다.

태풍 피해의 사건 진행은 원전마다 다르지만 근본 원인은 같다. 강한 태풍이 끌고 온 미세한 크기의 바닷물 방울이 원전 부지 내 송수전 설비의 절연용 애자 표면에 달라붙으면서 결과적으로 염분이 누적되어 절연 기능이 저하되었다. 이로 인해 송전 문제가 발생하여 발전이 자동정지되었다. 이어서 수전 기능도 저하되면서 이른바 ‘외부전원 상실’이 발생하여 비상 디젤발전기가 자동기동되었다.

이 사태로 한수원의 안전관리부터 탈원전 문제까지 논란이 뜨겁다. 송수전 설비에서 발생한 고장으로 원전을 보호하기 위해 발전 정지한 것은 설계 원칙에 잘 부합하는 일이다. 고속도로에 문제가 있어서 차를 미리 세우는 것과 같은 이치다. ‘외부전원 상실’에 따라 비상 디젤발전기가 자동기동된 것도 안전 관점에서 당연하고 안도할 일이다. 만약 기동되지 않았으면 정말 문제다. 비상 디젤발전기 고장에 대비하여 보조발전기, 대용량 배터리, 이동형 발전차량 등이 후속으로 준비되어 있다. 그만큼 전기공급이 중요한데, 비상 디젤발전기 자동기동은 역설적으로 안전성을 확인한 것이다. 안전성 측면에서 논란거리가 될 수 없다.

그렇지만 여러 원전에서 여러 사건이 단시간에 발생한 것은 전력망 안정성 및 시설 안전관리 차원에서 큰 문제다.

태풍 ‘마이삭’으로 원전 네 기가 두 시간 만에 순차적으로 정지되었다. 이들의 총 발전용량은 당시 우리나라 전체 전력의 약 7 % 정도에 이르러 자칫 전력망 안정성 문제를 야기할 수 있었다. 원전이 갑자기 정지되면 그에 상응하는 발전설비를 즉시 기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외부전원 상실’에 대해 개별 원전에서 잘 대비되었지만, 짧은 시간에 여러 건이 발생한 것은 시급해 개선되어야 한다. 유사 사례가 2003년 태풍 ‘매미’ 때 이미 있었고 미국과 영국의 원전에서도 아홉 번 이상 발생했다. 국내외 사례를 미리 보고도 대비하지 못한 점은 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설비보강 비용이 예상 손실금액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환경단체와 원자력 전문가의 시각과 처방이 극명하게 갈린다. 그러나 현재 원전을 안전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원전 안전 관리의 일차적 책임은 한수원에 있다. 한수원 경영진은 종합에너지기업으로 변신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핵심역량을 항상 원전 안전운전에 집중해야 하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탈원전 정책 이후 한수원 현장 근무자들의 사기는 많이 떨어져 있다. 이런 현실이 한수원의 안전관리 능력 쇠퇴로 이어질까 걱정되며 초유의 원전 6기 발전정지가 그 징후를 보인 게 아닌가 의구심이 생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부와 한수원은 안전관리 체계를 세심하고 정교하게 다시 정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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