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비평] To do or not to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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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부경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햄릿처럼 고귀한 신분이 아닌 우리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보다 “이걸 해, 말아?” 식의 사소한 고민이 일상을 지배한다. “오늘 점심은 뭘 먹나?”가 매일의 고민인 것처럼. 인생의 선배들은 어떤 일이든 해 보지 않고 후회하느니, 해 보고 후회하는 편이 더 낫다고 한다. 운동에 대한 결심도, 금연에 대한 각오도, 사랑한다는 고백도. 나의 은사님은 ‘결혼’과 ‘집을 사는 것’은 일단 저질러 놓고 봐야 한다는 삶의 지혜를 전수해 주셨다.

세상과 언론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SNS 글·사진·영상 통해 자기 과시
유명인 발언 여과 없이 보도되기도
때로는 기자가 무시할 필요성 있어

기자는 “오늘은 뭘 보도해야 하나?”란 문제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다. 늘 사건에 굶주려 취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취재한 내용이 일사천리로 보도되는 것도 아니다. 여기저기에서 까이고, 이런저런 보충 취재와 기사 수정을 거쳐야 한다. 이런 수고에도 불구하고 다른 뉴스에 덮이는 경우도 다반사다. 오죽하면 언론인을 게이트키퍼(gatekeeper·수문장)라 하겠는가? 골키퍼가 골을 막느라 사력을 다하는 것처럼 언론도 죽을힘을 다해 뉴스를 막는다. 뉴스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뉴스를 막는다니, 이게 무슨 궤변이냐고? 그만큼 데스킹 과정을 거쳐 실제 보도된 뉴스는 언론사가 자신 있게, 책임지고 내놓는 공동 작품(차마 여기서 상품이란 말은 못 하겠다)이란 역설적 의미다.

필자가 신문방송학과 교수랍시고 “이거 좀 뉴스로 실리게끔 해 주면 안 돼요?”라며 청탁을 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그래” 하고서, 한 번도 언론사에 연락을 취한 적은 없다. 필자의 눈에도 깜냥이 아닌데 연락을 해 본들 기사화가 될 것 같지 않아서다. 그러려니 하고 지나쳐 주면 좋겠는데, “이 교수, 어떻게 되었어요?”라고 재차 확인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그래서 언론사에서 “킬(kill) 당했어요”라고 둘러대면 “아니, 이게 왜 뉴스가 되지 않느냐”고 항변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들을 달래느라 밥도 사고, 술도 산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걸 간파한 악셀 호네트는 <인정투쟁>이란 책도 썼다. 이런 성향이 강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세상이나 언론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알리면 된다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에 글과 사진을 포스팅하고, 유튜브에 동영상을 찍어 올려 자신을 과시한다. 언론의 주목을 받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도 트위터를 애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최근 방송 뉴스를 보다가 여러 번 놀랐다. 차명진 전 국회의원의 페이스북 글이 버젓이 방송 뉴스에 등장하는가 싶더니, 주옥순 ‘엄마부대’ 대표의 유튜브 방송 내용도 여과 없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게 중의 압권은 전광훈 목사와 사랑제일교회 대변인 강연재 변호사였다. 이들 모두가 8·15 서울 광화문 집회의 주요 인물들이자, 코로나19 재확산 사태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었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들이 문재인 대통령과 현 정부를 원색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의 ‘핵심을 추려’ 전달하는 방송의 행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는 신성모독 발언도 서슴지 않는 전광훈 목사이기에 대통령 모욕쯤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언론이 이들의 발언을 정제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내보내고 있는가 말이다. 정녕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인가?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올해 초 발간한 <미디어는 어떻게 허위정보에 속았는가(The Oxygen of Amplification)>는 이와 유사한 현상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극우 ‘관종(관심에 목매는 사람을 뜻하는 관심종자를 줄인 은어. 영어로는 troller라고도 함)’들은 언론이 자신들을 무시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대놓고 인종주의나 나치즘을 선동하는 이들을 어떻게 제정신을 가진 기자들이 뉴스로 보도해주겠는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들은 계속해서 사건을 만들어 낸다. 그러다 우연히 소요사태라도 발생하면 언론은 어쩔 수 없이 보도할 수밖에 없다. 부상자가 속출하고 사망자도 발생했는데 어쩌겠는가? 보도를 통해서라도 기자들은 이들의 어리석음에 은근히 분노를 표출한다. 그런데 보도가 되는 순간 관종들은 언론이 낚였다(troll은 낚시에서 유래한 단어다)며 좋아라 한다. 그들은 “좋게든, 나쁘게든 널리 알려지는 게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고, 그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기자들이 그들을 조롱할 요량으로 기사를 쓰지만, 오히려 당하는 쪽은 기자라는 게 연구의 결론이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 했다. 때론 아예 무시하는 것이 일부라도 보도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때가 있다. “기자님들, 제발 좀 잘 막아 주세요. 아 참, 진중권 교수님의 페이스북 포스팅도 마크 좀 해 주시고요. 너무 휘젓고 다니시잖아요. 좀 쉬시게 내버려 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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