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균의 세상 터치] 희망고문은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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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끝이 없는 어두운 터널 속을 지나고 있는 심정이다. 한국 경제가 저성장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 지 오래다. 올 1월 계획한 새해 꿈을 제대로 실천해 보기도 전에 코로나19 재난을 맞아 빼앗긴 일상은 처음 경험하는 사회적 거리 두기 장기화로 회복될 기미조차 없다. 이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보다 심하다고 국민들은 아우성친다. 애석하게도 희망이 보이질 않고 암울한 요즘이다.

희망이란 단어는 국어사전에서 ‘어떤 일을 이루거나 무엇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과 ‘앞으로 잘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풀이돼 있다. 이 바람과 가능성이 결합하면, 안될 걸 알면서도 될 것 같은 희망을 줘 오히려 고통스럽게 만드는 ‘희망고문(希望拷問)’이 되기 마련이다. 희망고문은 거짓된 희망으로써 견디기 힘든 고문처럼 괴로움을 주는 그릇된 행위를 뜻한다.

가능성 없는 일에 매달리고 미련 남아
불필요한 고통 때문에 고생하기 일쑤

거짓 낙관론에 헛된 기대감 키우기도
취준생·계약직, 결과에 실망 많이 해

신공항 결정 지연은 대표적 희망고문
정부, 부울경 숙원 빨리 수용하기를

희망고문은 프랑스 소설가 빌리에 드릴라당이 1883년에 쓴 단편소설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에 잘 표현돼 있다. 고리대금업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괴롭힌 혐의로 화형이 선고돼 지하 감옥에 갇혀 고문당하던 유대인 랍비가 화형식 전날 밤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틈을 타 탈옥에 성공한 순간 바로 앞에 나타난 재판관에게 잡혀 좌절하고 만다는 내용이다. 랍비가 희망에 부풀어 망가진 몸으로 힘들게 탈옥했으나, 사실은 재판관이 일부러 문을 잠그지 않은 데 속은 것. 랍비에게 희망이란 이름으로 가해진 마지막 고문이었던 셈이다. 이는 거짓 희망은 잔혹한 고문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프랑스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으로 1953년 초연된 <고도를 기다리며>란 희곡은 반복되는 희망고문의 부조리한 측면을 다뤘다. 이 작품의 두 주인공은 “내일은 꼭 오겠다”는 고도에게 자꾸 속아 50년 가까이 하염없는 기대감과 기다림에 지쳐 아무것도 못 하는 헛된 수고를 했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희망은 모든 악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고통을 연장하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희망고문을 지적했다. 신체적인 고문은 사라졌지만, 희망고문은 사회 곳곳에 현존해 많은 이들을 힘들고 안타깝게 한다. 일말의 가능성 탓에 희망을 못 버리거나 실현성이 부족한 립서비스가 남발되고 있는 까닭이다.

예전에 ‘고시 낭인’이란 신조어를 낳았던 고시생들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미련과 생고생은 이제 극심한 취업난 속에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공시생들의 몫이 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원하는 곳마다 떨어지는 취업준비생들은 희망고문의 아픔에 시달리기 일쑤다. 비정규직에게 조금만 더 참으면 정규직이 될 거란 유혹의 말도 희망고문에 해당할 테다. 복권이나 도박 중독증은 희망고문이 야기한 한탕주의라고 할 수 있다.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는 거의 매년 어정쩡한 성적으로 ‘가을야구’가 간절한 야구도시 부산 팬들을 웃기고 울리며 애간장을 태운다. 올해 허문회 감독이 8월부터 치고 올라간다고 장담했으니 포스트시즌에 진출해 희망고문 우려를 불식시킬지 두고 볼 일이다.

무엇보다 걱정되는 문제는 정부의 경제 콘셉트가 희망과 낙관이어서 희망고문을 키우는 데 있다. 23차례나 내놓은 부동산 대책이 시장의 현실과 달라 논란을 빚는 등 헛발질의 연속인데도 정부는 낙관론을 펼치고 있다. 게다가 350만 부산시민의 28년 숙원인 동남권 관문공항 역할을 할 가덕신공항 건설에 미온적인 정부의 태도는 대표적인 희망고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21대 국회 역시 경제난 타개와 민생 안정을 위해 여야 협치를 열망하는 국민들에게 희망고문을 안긴다. 여야가 말로는 타협과 협력을 외치지만, 당리당략과 이념을 앞세운 정쟁으로 ‘동식물 국회’로 지탄받은 20대 국회 모습에서 별반 달라진 게 없어서다.

희망고문은 성공보다 실패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개인에게는 과감한 단념이 희망고문을 피하는 현명한 방법이며 심신 건강에 이로울 수 있다. 정부는 현실과 동떨어진 낙관론은 국민과 국가를 더 큰 위험으로 내몰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 경제정책 전반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히 800만 부산·울산·경남 주민들이 가덕신공항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건 그만큼 필요성 있고 절박한 방안으로 공감한다는 걸 인식해 전격 수용하거나 하루빨리 가부를 결정해 에너지 소모를 줄여야 할 것이다. 가덕신공항은 다른 희망고문 사례와 달리, 동남권을 발전시키는 기폭제가 될 실현 가능한 꿈이란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22일 모처럼 코로나19의 2차 긴급재난지원금 추석 전 지급을 위한 4차 추가경정예산안 통과에 합의한 것을 계기로 진정한 협치에 나서길 바란다. 불필요한 희망고문을 중단할 때다. kb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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