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리품으로 챙긴 ‘커피 자루’, 빈에 커피 향기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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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인문학 기행

17~18세기 오스트리아 빈 커피하우스의 풍미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카페 첸트랄. 빈 주민들은 물론 외국 관광객이 즐겨 찾는 인기 명소다. 순서대로 콜슈이츠키 조각상과 새 그림이 그려진 아름다운 커피잔.

오스트리아 빈의 커피하우스, 즉 카페는 세계 최초는 아니었다. 그러나 빈은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서도 이루지 못한 독특한 커피하우스 문화를 일구었다. 커피와 커피하우스는 빈에서 비로소 전성기의 서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재미있는 역사는 이러하다.

1683년 전쟁 패한 오스만튀르크군
숙영지에 커피 수백 포대 버리고 도망
황제가 영웅 콜슈이츠키에 하사
전쟁 후 빈 최초의 ‘카페’ 문 열어

에스프레소 바 등장, 위기 맞았지만
독특함·고급스러움 내세워 다시 인기


■오스만튀르크의 빈 포위

1683년 7월 오스만튀르크의 술탄 메흐메드 5세가 유럽으로 10만 병력을 보냈다. 그의 목표는 유럽의 수도나 마찬가지였던 빈을 점령하겠다는 것이었다.

오스만튀르크군은 빈으로 바로 쳐들어가 성을 포위했다. 병력에서 압도적으로 앞서 있었기 때문에 빈 시내를 바로 공격하면 손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오스만튀르크군 총사령관인 무스타프는 의도적으로 포위 작전을 구사했다.

‘유혈이 낭자한 전투를 벌여 서로 큰 인명 피해를 내기보다는 도시를 포위해 항복을 받아내는 게 낫지.’

오스트리아군 병력은 겨우 1만 2000여 명에 불과했다. 여기에 일부 비정규군이 있었다. 이들을 이끈 사람은 스타렘베르그 공작이었다. 레오폴트 1세 황제는 일찌감치 달아나 빈에 없었다.

이슬람군의 공격 사실을 알게 된 교황은 서둘러 지원군을 보냈다. 이탈리아와 독일 등에서도 젊은 귀족들이 군대를 꾸려 달려왔다. 이들은 빈 외곽에 진지를 차렸다. 하지만 이들만으로는 오스만튀르크 대군에 맞설 수 없었다.



■폴란드 지원군의 반격

스타렘베르그의 탁월한 수비전략 덕분에 빈은 여러 달 동안 버틸 수 있었다. 항복을 기다리던 무스타프는 인내심을 잃어버렸다. 그는 빈을 무력으로 점령하기로 했다.

“관용을 베풀지 말라. 신의 분노를 저들에게 보여주도록 해라!”

초가을 무렵 전투는 매우 격렬해졌다. 사상자도 그만큼 늘어났다. 포위당한 빈에서는 설상가상으로 전염병이 만연했다. 여기에 오스트리아군은 총알마저 바닥날 지경에 이르렀다. 스타렘베르그는 항복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할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다. 폴란드의 국왕 얀 소비에스키가 이끄는 지원군이 달려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버틸 힘이 없었다. 당시 폴란드군은 유럽 최강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견디려면 폴란드군이 어디쯤 왔는지를 알아야 해.’

스타렘베르그는 빈 외곽에 주둔한 다른 나라 지원군에 첩자를 보내 정보를 알아보기로 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임무였다. 그 역할을 하겠다면서 자처하고 나선 사내가 있었다. 우크라이나 출신인 콜슈이츠키였다. 다른 전쟁에 참전했다가 오스만튀르크군에 포로로 붙잡혀 수년간 이스탄불에서 노예 생활을 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었다.

“저는 투르크에서 오래 살아 투르크 언어를 구사할 줄 압니다. 저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줄도 알지요. 저에게 임무를 맡겨 주십시오.”

콜슈이츠키는 빈 성벽 북쪽의 해자로 빠져나가 오스만튀르크 진영에 숨어들었다. 때로는 오스만튀르크 병사인 것처럼, 때로는 군대를 따라온 상인인 것처럼 행세했다. 그는 오스만튀르크 진영을 지나간 뒤 배를 타고 다뉴브강을 건넜다.

콜슈이츠키는 강 건너편 칼렌베르그 산에 주둔하고 있던 유럽 지원군의 총사령관 로레인 공작을 만날 수 있었다. 그가 빈의 심각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을 때 마침 폴란드 군대가 도착했다. 소비에스키는 콜슈이츠키에게 빈으로 돌아가 작전을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내일 아침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면 오스트리아 병사들에게 성문을 열고 나와 적을 공격하라고 전하게. 우리가 먼저 뒤에서 적을 기습할 것이야. 그렇게 되면 오스만튀르크군은 포위를 당하게 돼 바로 허물어질 걸세.”

다음날 소비에스키 국왕은 8만여 명에 이르는 기독교 연합군을 이끌고 오스만튀르크 숙영지를 기습 공격했다. 빈 시내에 웅크려있던 오스트리아 병사들도 물밀 듯이 몰려나와 오스만튀르크군을 공격했다. 적의 양면 협공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오스만튀르크는 이날 전투에서 엄청난 병력을 잃고 대패한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빈 최초의 커피하우스

오스만튀르크군이 급하게 달아나는 바람에 그들이 갖고 있던 온갖 보급품은 숙영지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천막 수천 개는 물론이거니와 수천 마리의 말, 낙타, 소, 양과 온갖 희귀한 물건이 다 포함돼 있었다.

그중에는 오스트리아인이 처음 보는 이상한 물건도 있었다. 희한하게 생긴 갈색 콩이 가득 찬 포대 수백 개도 있었다. 바로 커피였다. 빈 사람들은 그때만 해도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콩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냄새를 맡은 콜슈이츠키가 콩 포대를 집으로 옮겼다. 그는 엄청난 분량의 커피를 보고 빙긋 웃었다.

“성모 마리아시여! 커피가 불타고 있군요. 당신이 커피를 모르신다면 저에게 주십시오. 저는 이 콩을 정말 유용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요.”

빈으로 돌아온 황제 레오폴트 1세는 전쟁의 최고 공로자인 콜슈이츠키를 불러 온갖 금은보화를 상으로 내렸다.

“더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라.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

“오스만튀르크군의 숙영지에서 압수한 콩 포대 수백 개를 제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 콩을 제가 가지도록 해 주십시오.”

커피가 뭔지 모르는 황제는 아무런 생각 없이 승낙했다. 황궁을 웃으며 나온 콜슈이츠키는 얼마 뒤 빈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열었다. 오스트리아인이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콜슈이츠키 덕분이었다.

오늘날 빈 중앙역 인근에 콜슈이츠키의 이름을 딴 콜슈이츠키 가세(거리)가 있다. 그곳의 한 건물 2층 외벽에는 투르크 옷을 입고 커피잔을 얹은 쟁반을 든 콜슈이츠키의 동상이 있다. 빈의 ‘커피 제조자 길드’가 콜슈이츠키를 기념하며 세운 것이다.



■빈의 커피하우스 문화

사실 객관적 사료에 따르면 빈에 커피하우스를 처음 연 사람은 콜슈이츠키가 아니라 1685년 아르메니아인 요하네스 디오다토였다. 누가 개척자였든, 이후 빈에는 커피하우스가 늘어났고, 서비스도 다양해졌다. 1720년 ‘크라머슈에스 카페하우스’는 처음으로 손님들을 위해 신문을 비치했다. 다른 커피하우스에서는 따뜻한 음식과 가벼운 술을 내놓기도 했다.

1814~1815년 ‘비엔나 회의’ 이후 빈의 커피하우스 문화는 전성기를 맞았다. 당시 커피하우스는 넓은 방에 빨간 벨벳 의자를 비치하고 큰 샹들리에를 천장에 건 형태였다. 좁은 집에 살던 빈 사람들은 커피하우스를 ‘넓은 거실’, ‘두 번째 집’이라고 불렀다. 빈 커피하우스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당시 유럽에서 빈 방식의 커피하우스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인생의 질을 판단하는 요건 중 하나가 됐다.

1950년대 빈 커피하우스는 위기에 빠졌다. 이탈리아 방식의 에스프레소 바가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전통적인 빈 커피하우스는 낡은 문화로 치부돼 서서히 사라졌다. 빈 커피하우스가 되살아난 것은 1983년 빈 커피하우스 탄생 300주년이 계기가 됐다. 빈 사람들은 빈 커피하우스의 독특한 고품질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 빈 커피하우스는 2011년 유네스코 세계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지금은 빈 여행 필수 방문코스가 됐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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