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얼굴 가린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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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석 문학평론가

코로나19의 유행은 전 세계적으로 마스크의 유행을 불러왔다. 지난 2~3월만 해도 스페인이나 프랑스에서는 좀처럼 마스크를 쓸 수 없었다. 해당 지역에서 코로나19의 위기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직감했음에도, 마스크에 대한 해당 국민의 인식 탓에 ‘감히’ 쓸 수 없었다고 해야 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국 사회는 마스크에 대한 편견에서 일찍부터 벗어나 있었다. 덕분에 코로나19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코로나19의 확산과 대유행은 마스크의 의미를 다소 변화시켰다. 한국 사람들의 마스크 착용에는 방역 이외의 의미가 곁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후 마스크 착용 명분 확산
온라인 수업·학술대회 참가자들
개인 공간에 있어도 마스크 계속 써
느슨한 연결로 타인과 공존 욕망 충족

타인과의 격차가 고착된다면
친밀함·공동체적 습성 잊힐 수도



온라인 수업을 하다 보면, 학생들이 개인 공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스크를 벗지 않는 광경을 흔하게 목격한다. 온라인 학술대회나 회의에 참석한 학자나 연구자들도 동일한 반응을 내보인다. 발표자와 토론자가 아닐 경우, 자신의 화면을 끄고 조용한 청취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마스크를 쓸 수 있는 명분이 확산하면서,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라면 자기 얼굴을 가리겠다는 풍조 역시 힘을 얻고 있다. ‘나’에 대한 노출을 최대한 줄이려는 경향은 과거에도 없지는 않았다. 다만 기존의 익명성 추구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숨기는 것에 치중했다면, 팬데믹 이후의 교재 방식에서는 얼굴은 감추되 타인과의 연결 통로는 끊지 않으려는 이중적 경향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마스크를 써서 얼굴은 가리되, 타인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는 남겨두고자 하며,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은 끊지 않되, 느슨한 연결만으로 그 욕망을 충족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원격 수업에 참여하지만, 얼굴은 감추려고 하고, 화상 회의와 온라인 학술대회에 동참하지만, 상대의 목소리만 듣는 것에 만족하는 신기한 현상이 그렇게 창출되었다.

마스크를 공식적으로 써야 하는 의무를 부여받자, 우리는 얼굴을 가리고 타인을 적정한 거리로 밀어낼 권한마저 행사하기 시작한 셈이다. 그러자 나와 세상 사이에 자발적 거리가 생겨나면서, 과거의 친밀함과 공동체적 습성은 잊히고 있다. 어쩌면 이 혼란이 종식되어도 예전 같은 친밀감은 되찾기 어려울지 모르며, 이전 세계와는 다른 유대감을 형성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우리는 거리에 민감한 민족이었다. 가까운 조선 시대만 해도 양반과 민중은 떨어져 살아야 했고, 남자와 여자는 분리되어 있었다. 서민들의 생활까지야 그렇지 않았겠지만, 사회적으로 생성된 자연스러운 거리(두기)는 남녀와 상하 계층에서 권장하는 풍습이자 엄중한 관습이었다. 하지만 이때의 거리두기는 마냥 긍정적일 수 없었고, 부와 권력의 편중이 일어나면서 이러한 장벽 역시 더욱 가중되었기에 무작정 수용할 수만도 없었다. 결국 신분제 사회는 무너졌고 그러한 거리는 사라져야 했다.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국난을 겪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전쟁을 겪고 어려움에 시달리고 독재와 싸우면서, 우리는 사회의 경계를 허물고 계층을 통합하는 일련의 움직임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심정적으로 하나가 되기를 원했고, 개인으로서의 나를 드러내고 위협에 맞서는 행위를 선택해야 할 때도 있었다. 최근에도 독재의 위협과 불의 앞에서, 어깨를 겯고 함께 나서기를 바랐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하나 되고자 하는 결의를 심정적인 원류로만 남겨두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구성원 사이의 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굳어지고 타인과의 격차가 고착되면, 우리는 자신을 가면 뒤로 감추어야 할 이유와 명분을 그대로 둔 채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참 달라져 있을 것이다. 씁쓸하게도, 지금은 그러한 세상으로 가는 기로일지도 모르겠다.



/김남석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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