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와 여인 ‘금지된 사랑’ 슬픈 연가가 흐르네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유럽 인문학 기행] 17.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미라벨 궁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는 ‘소금의 도시’라는 뜻이다. 대도시인 빈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재미있는 여행지다. 이곳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무대이기도 하다. 영화에 나오는 장소 중에 미라벨 궁전이 있다. 여기에 얽힌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다뤄본다.



잘츠부르크 영주 주교, 시의원 딸과 사랑
결혼 원했지만 교황 허가 가로막혀 눈물
비밀 결혼 생활 아내 위해 궁전 선물
외부 침략에 주교 자리 빼앗기고 감옥행
아내도 궁전 쫓겨나 그리움 속 여생 보내
거듭된 흔적 지우기 속 계단 하나만 남아


■금지된 사랑

잘츠부르크 영주 주교 볼프 디트리히가 사랑했던 연인 살로메 알트를 위해 건설한 미라벨 궁전 전경. 지금은 잘츠부르크 시청 청사로 사용된다.


봄에는 각종 꽃이 피어 황홀한 풍경을 만드는 미라벨 정원.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잘츠부르크에 있는 줄 나만 몰랐구나!’

잘츠부르크의 영주 주교 볼프 디트리히 알테나우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평생을 혼자 살 생각이었던 그의 눈앞에 뜻하지 않게 첫사랑이 나타난 것이었다. 1590년대 초 잘츠부르크 시내의 한 식당에서 열린 결혼 연회에서였다.


미라벨 정원의 시원한 분수.


당시 31세였던 볼프 디트리히는 이곳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다. 시의회 의원인 빌헬름 알트의 딸 살로메 알트였다. 잘츠부르크에서 최고의 미인이라고 칭송받는 여인이었다. 그는 발개진 얼굴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살로메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아름다운 분을 여기서 만나다니 신의 뜻은 정말 알 수가 없군요.”

22세였던 살로메는 인사를 하는 사내가 누구인지 금세 알아보았다. 잘츠부르크의 최고 권력자인 영주 주교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주 주교는 교회에서는 주교 역할을 하면서 마치 군주처럼 세속적인 일도 도맡아 처리하는 자리였다. 사실 살로메는 이전에 볼프 디트리히를 본 적이 있었다. 인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깊은 호감을 갖고 있었다.

두 남녀는 그 자리에서 한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주 큰 소리로 웃기도 했고, 아주 낮은 소리로 다정하게 속삭이기도 했다. 주변에서 뜨거운 시선이 쏟아지는 걸 두 사람은 전혀 알지 못했다.

볼프 디트리히는 이후 수시로 살로메를 만났다. 때로는 그가 사는 영주 주교 사택으로 부르기도 했고, 성당에 가서 만나기도 했다. 갑자기 찾아온 사랑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던 그는 두어 달 뒤 빌헬름 알트의 집을 찾아갔다.

“살로메를 저에게 주십시오.”

“영주 주교는 결혼할 수 없는 신분입니다.”

“나중에 교황의 특별 허가를 받겠습니다.”

“저는 딸이 주교의 숨겨둔 여인으로 사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빌헬름은 완강히 반대했다. 하지만 살로메의 생각은 아버지와 달랐다. 그녀는 인생의 사랑을 놓쳐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나중에는 아버지가 골라주는 귀족 청년과 사랑 없는 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숨겨둔 여인이 돼도 상관없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살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지금은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나중에는 비극이 되고 말 거야. 내 말을 듣지 않겠다면 부모, 자식의 연을 끊고 가거라.”

살로메는 아버지 대신 사랑을 택했다. 그녀는 짐을 챙겨 볼프 디트리히의 집으로 갔다. 영주 주교가 ‘애인’을 들였다는 소식은 금세 잘츠부르크에 퍼져 나갔다. 다들 뒤에서 수군거렸다. 하지만 앞에서는 아무도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 볼프 디트리히는 최고 권력자였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바친 선물

볼프 디트리히는 삼촌 마르크 시티치 폰 호헨넴스 알템프스를 찾아갔다. 어릴 때부터 그를 친자식처럼 아끼며 도와준 사람이었다.

“교황 성하를 만나 편지를 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 심정을 솔직히 고백하고 성하와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특별 허가를 요청했습니다.”

알템프스는 로마에서 교황을 만나 편지를 전달했다. 그러나 교황은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볼프 디트리히는 이후에도 일곱 차례나 특별 허가를 요청했지만, 교황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볼프 디트리히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주교 자리를 내놓고 속인으로 돌아가 살로메와 정식 결혼하거나, 세속의 비난을 무릅쓰고 비밀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두 번째 선택지를 골랐다.

대신 주교 관사에서 비밀 결혼 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살로메를 위해 잘자크강 건너편에 새로운 저택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곳에 아름다운 궁전과 훌륭한 정원을 지어야겠어. 성 밖에 있는 곳이니 사람들의 관심을 덜 받겠지. 살로메와 아이들도 훨씬 편할 거야. 새로 짓는 저택에 가문의 성을 붙여 알테나우 궁전이라고 부르면 되겠군.’



■사랑은 고통이로구나

볼프 디트리히와 살로메의 사랑은 행복하게 끝나지 못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식은 게 아니라 국제정세 때문이었다.

1611년 볼프 디트리히는 바바리아의 선제후 막시밀리안과 마찰을 빚었다. 선제후는 군대를 보내 잘츠부르크를 공격했다. 볼프 디트리히는 주교좌성당 참사회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희망을 저버렸다. 게다가 사촌 동생 마르쿠스 시티쿠스 폰 호헤넴스마저 막시밀리안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다. 그는 사촌 동생에게 영주 주교 자리를 빼앗기고 호헨잘츠부르크 성의 감옥에 갇혀 버렸다.

호헤넴스는 살로메에게 해코지하지는 않았다. 남편이 남겨준 재산을 갖고 궁에서 나가라고 한 게 고작이었다. 살로메는 벨스로 이주했다. 그녀는 다시는 볼프 디트리히를 만나지 못했다. 편지만 겨우 주고받을 수 있었다.

볼프 디트리히의 감방에는 작은 창문이 하나 달려 있었다. 그 창을 통해 알테나우 궁전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매일 성경을 읽거나 틈틈이 창문 밖을 내다보는 게 그가 온종일 하는 일의 전부였다. 그는 결국 감옥에 갇힌 지 5년만인 1617년 감방 벽에 짧은 글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사랑은 결국 고통이로구나.’살로메는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장례식을 치를 수 없었다. 그녀는 대신 검은 상복을 입었다. 이후 죽을 때까지 상복을 절대 벗지 않았다. 그녀는 14년 뒤인 1631년 남편 곁으로 올라갔다.



■아름다운 전망을 가진 궁전

호헤넴스는 사촌 형이 만든 아름다운 궁전에 반해 그곳에서 살기로 했다. 대신 형의 흔적을 지우려고 알테나우라는 이름을 떼고 미라벨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아름다운 전망’이라는 뜻이었다.

세월이 흘러 17세기 중엽 영주 주교 프란츠 안톤 하라크는 궁전을 리모델링했다. 이렇게 해서 미라벨 궁전은 오늘날의 이름과 모습을 갖게 됐다. 미라벨 궁전 가운데에는 계단이 있다. ‘천둥의 계단’이라는 뜻인 ‘도너스티게’로 불린다. 볼프 디트리히가 만든 첫 궁전의 유일한 흔적이다.

미라벨 궁전 소유권은 1866년 잘츠부르크시에 넘어갔다. 지금은 시청 청사로 사용된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