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지역 신문 소멸이 초래한 광기의 미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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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디지털센터장

지금 미국은 과거와 전혀 다른 의미에서 ‘용광로’다. 11월 3일 대선을 앞두고 거대한 분열의 도가니가 되어 있어서다.

부유세 같은 좌파 정책에 열광하는 밀레니얼 세대는 민주당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다. 반면 중장년 백인들의 공화당 지지율은 요지부동이다. 세대 간, 진영 간 대결뿐만 아니라 인종과 남녀, 지역, 이민자들이 서로 똘똘 뭉쳐 상대를 배척하는 풍경이 광기에 가깝다.

조미료 빗댄 유사 매체 ‘핑크 슬라임’
정상 언론인 척하면서 정파적 보도
경영난 퇴출 지역 신문 빈자리 차지
미 대선 앞두고 1200곳 우후죽순

분열갈등 부추겨 민주주의 위협
지역 신문 역할 되새기는 반면교사


코로나19 대유행 와중에 중앙 정부와 주 정부의 골도 깊어졌다. 사상 유례없는 경합 주 당선 시비나 개표 지연, 불복 사태의 어두운 그림자가 총기 판매 급증 뉴스에 드리운다. 합중국(united states)은 통합(united)에서 멀어지고 있다.

당동벌이(黨同伐異)식의 양극화는 정파적 여론몰이와 짝을 이룬다. 디지털 혁신의 쓰나미에 밀려 전통 언론이 속속 문을 닫으면서 민주주의를 지탱해 온 저널리즘이 작동하지 않을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지난 8월 위스콘신주 커노샤에서 17세 백인 카일 리튼하우스가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해 2명을 숨지게 했다.

<커노샤 리포터>는 인공지능이 자동 생산하는 휘발유 가격, 주택 건설 동향을 뉴스 사이트에 올리고 있었는데, 총격 사건 이후 돌연 가해 청소년을 영웅시하는 보도를 쏟아 냈다. 숨진 피해자의 범죄 경력을 들춰내거나 시위의 취지보다는‘상권 보호’ 논리를 앞세우는 식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15일 자 ‘‘핑크 슬라임’이 지역 뉴스를 휩쓸다’ 제하의 기사에서 “<커노샤 리포터>는 미 대선을 앞두고 생겨난 수백 개의 지역 뉴스 매체 중 하나인데 비정치를 표방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이 이를 ‘핑크 슬라임’으로 부른다”고 보도했다.

‘핑크 슬라임’은 글로벌 식품업체들이 사용 중단한 저질 소고기 맛 조미료(분홍색 점액물)다. 정상적인 언론으로 위장한 가짜 매체들이 뉴스로 포장된 프로파간다를 뉴스 사이트와 SNS에서 퍼뜨리는 것을 빗댄 신조어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저널리즘리뷰는 최근 <대선을 앞두고 의심스러운 ‘핑크 슬라임’ 뉴스 사이트가 3배 증가했다>는 보고서를 냈다. 연초 450개였다가 대선에 임박하면서 1200여 개로 늘었다는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기사에서 “전통 지역 언론이 퇴출되자 그 공백을 ‘핑크 슬라임’이 채웠다”고 지적했다. 이어 “언론 매체는 법적으로 소유 구조나 후원자를 공개할 의무가 없어 선거를 앞두고 잘못된 선전과 정보를 퍼뜨리는 데 휘둘릴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우려에 그치지 않고 상당수 사이트가 “수익을 올리고,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설득하는 데 사용”되면서 저널리즘과 배치되는 정파적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버드대 니만연구소는 “겉으로 독립성을 표방하면서 광고를 게재하지 않고 유료 구독을 권하지 않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여론에 영향을 미치려는 후원자 자금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지적했다.

‘핑크 슬라임’은 보수적인 자금줄에 얽혀 네트워크화되어 있는데, 평소 인공지능이 자동으로 만든 뉴스를 내보내다가 특정 의제에 활용될 만한 사건이 발생하면 ‘사람’이 개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미국 언론학계에서는 ‘뉴스 사막’이 화두였다. 지역 신문사가 대량 폐간되면서 전국적으로 ‘동네 뉴스’가 사라지는 사막화 현상이 나타났는데, 그 빈틈을 가짜 뉴스와 유령 매체가 들어와 정치 갈등을 부추길 것이라는 우려였다. 경고음이 울려진 지 1년도 채 안 되어 우려가 눈앞에 펼쳐졌다.

뉴스 사막의 폐해를 언론학자들만 우려한 게 아니다. 결국 정치권도 나섰다. 미 하원에 지난 7월 <지속가능한 지역 신문 법안>(Local Journalism Sustainability Act)이 제출되어 현재 민주당 52명, 공화당 20명 등 초당적 지지를 받고 있다.

이 법안은 신문 구독료 80%, 기업 광고비 80%에 대해 세액 공제하고, 기자 급여에도 파격적인 공제를 제공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사기업인 언론사를 살리려 세제 혜택까지 들고 나온 것은 지역 뉴스가 대체불가한 공공재이며, 그 부재가 초래하는 사회적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뼈아픈 교훈에서 나온 결과다.

하지만 만시지탄이다. 이미 대다수 정통 지역 언론은 사라졌다. 대통령 선거가 16일 뒤로 다가온 지금 개표는 물론 당선자 발표가 온전히 진행될지 여부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가짜 언론 ‘핑크 슬라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미국 사회는 지역 신문이 퇴출된 ‘뉴스 사막’으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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