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의 시인의 서재] ‘개 같은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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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단풍 든 나무들에게 먼저 말을 건넨 것일까. 가을이 깊어 간다. 쓸쓸한 낙엽 같은 최승자의 시를 읽는다. 시인은 ‘개 같은 가을이’라는 시에서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라고 표현한다. 오래전 이 시를 읽었을 때, 황폐한 영혼의 울림이 아주 강렬하게 전해져 왔다.

최승자의 시에 등장하는 개는 황량하게 버림받은 쓸쓸한 들개 같다. 내면의 깊은 폐부를 드러내는 그녀는 왜 저리 고독했을까. 지상으로 초대된 우리 모두는 기쁨, 고통, 절망을 겪도록 정해진 운명이다.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란 시구에서 지독한 외로움이 묻어난다. 남녀 간의 사랑도 결국은 덧없고 때로는 비정하다.

‘임신 14주 처벌 않는 낙태죄’ 입법 예고 논란
낙태를 선택해야만 하는 아픔 누가 알까
여성에게 아이 낳는 일이 행복과 축복이 되는
성숙한 사회 여건 만드는 게 먼저 아닐는지

가을에 최승자의 시를 다시 읽는 이유는 낙태죄에 대한 사회적 논란 때문이다. 그녀의 시 ‘Y를 위하여’에서는 낙태 시술을 받는 여성의 처참한 심경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수술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을 때/ 시멘트 지붕을 뚫고 하늘이 보이고/ 날아가는 새들의 폐벽에 가득한 공기도 보였어’라고 아주 사실적으로 그 상황을 전달한다. 그러면서 시적 화자는 ‘난 죽으면서 보았어/ 나와 내 아이가 이 도시의 시궁창 속으로 시궁창 속으로/ 세월의 자궁 속으로 한없이 흘러가던 것을’이라고 절규한다. 어쩔 수 없이 낙태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여성들이 의외로 많다. 뱃속의 아이를 죽이고픈 어미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독일 철학자 발트 벤야민은 <폭력에 대한 비판>에서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을 설명한다. 신화적 폭력을 설명할 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니오베를 통해 논지를 전개한다. 니오베는 테베의 여왕이며 리디아의 탄탈로스의 딸이었다. 미모와 부를 모두 갖춘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오만했다. 더구나 니오베는 자식 복도 많아 아들과 딸을 각각 7명씩 낳아 자랑하였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밖에 낳지 못한 여신 레토는 자식들에게 오만방자한 니오베를 처벌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래서 니오베의 14명의 자식들은 모두 활에 맞아 죽는다. 이것을 본 남편 알피온은 자살하였고 니오베는 계속 울다가 바위로 변해 버렸다.

이처럼 신화에 등장하는 폭력은 잔혹하다. 자식 자랑을 좀 했다 치더라도 그것 때문에 죽음을 초래한 것은 법의 폭력이다. 니오베 이야기가 아주 극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만 지나치게 윤리나 도덕 혹은 법을 강제할 때 그것이 인간을 잔혹하게 옭아맬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반면 신적인 폭력은 잔혹한 법의 심판을 정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의 사례도 있지만 신약에 나오는 예수의 행동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대교 율법에서는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는 조항이 있었다. 군중들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서 죽이려 하였다. 그때 예수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는 자는 돌을 던져도 된다”라고 말했다. 군중들은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누군가를 법의 잣대로 가혹하게 단죄하는 폭력을 정지시키는 것이 신적인 폭력이다. 그것은 부당한 법이나 사악한 정치권력을 붕괴시키는 성스러운 자비의 실현에 가까운 개념이다.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를 위헌이라고 결정한 이후에 ‘임신 14주까지는 처벌하지 않는 낙태죄’ 입법 예고가 나오자 여성 단체의 반발이 거셌다.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임신 결정권 사이에 어떤 선택이 옳은지 고민이 깊다. 임신 15주부터 24주까지는 현행 모자보건법이 허용하고 있는 성폭력에 의한 임신이나 건강상의 이유 등과 함께 헌재 결정문에서 거론된 사회·경제적 사유가 있을 때 낙태가 가능하도록 했다. 다만 낙태는 의사가 의학적으로 인정한 방법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경제적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상담 및 숙려 기간을 거치도록 했다.

여성 단체들이 반발하는 이유는 여성들에게 여전히 죄의 굴레가 남게 된다는 점 때문이다. 태아의 생명은 아주 소중하다. 낙태죄를 없앨 경우 생명 경시의 풍조가 성행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성들이 고통스러운 낙태를 선택하지 않도록 사회적 여건을 성숙시키는 것이다. 왜 아이 낳기를 싫어하는가? 여성에게 부과되는 육아의 짐이 여전히 과중하기 때문이 아닐까. 미혼모의 출산이나 동거 부부의 자녀에게도 과감하게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 한국에서도 결혼이라는 제도가 점점 느슨해지거나 변화될 것이다. 가혹한 법의 굴레를 씌우기보다는 아이를 낳는 것이 축복과 행복이 되는 사회가 되도록 법과 제도를 혁신할 필요가 있다.


/시인·‘시와사상’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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