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농업유산 '둠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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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고성 지역에서는 집 근처 ‘둠벙’에 용왕님이 산다고 믿었다. 정초가 되면 가족의 무병장수와 재복을 기원하면서 둠벙에 제례를 올렸다. 조선 후기 유학자 구상덕 선생이 조선 영조 1년부터 37년까지 37년간 고성 일대 생활을 기록한 <승총명록>에도 둠벙이 확인된다.

하천이 발달하지 않은 경남 고성군 해안가에서 농사를 지을 때 쓰던 물웅덩이인 둠벙은 17세기부터 본격 조성됐다. 용출수가 나는 곳에 땅을 파고, 우물처럼 석축을 쌓았다. 둠벙 한 개가 인근 논 1~2 필지에 물을 댈 정도의 용수량을 갖고 있다. 현재 고성에 확인된 둠벙 숫자는 444개. 지금은 저수지와 경지정리 등으로 사라지고 있지만, 그 기능은 유효하다. 지난 2012년 고성군에 가뭄이 들었을 때 둠벙을 이용해 천수답 300마지기에 물을 댈 수 있었다. 기후변화에 따른 물 부족 시대에 둠벙이 작은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둠벙은 논에 물만 공급하는 관개시설이 아니었다. 마을 주민을 하나로 잇는 공동체의 중심, 용왕님이 산다고 믿는 마음의 중심이었다. 마을공동체에서는 둠벙 조성, 이용, 유지를 위해 수리계를 운영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런 공동체와 벼농사 문화는 고성농요, 고성오광대 등 대표적인 민속놀이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에 통영으로 가던 경상감사가 고성을 지나다 고성농요 소리에 도취돼 밤새 어울려 놀고 상을 내리고 떠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질 정도다.

둠벙이 ‘제14호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된 데 이어 세계관개시설물 유산 목록에도 올랐다.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는 71차 집행위원회를 열고 ‘고성 해안지역 둠벙 관개시스템’을 세계관개시설물 유산으로 등재했다고 9일 밝혔다. 세계 96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국제관개배수위원회는 고성 둠벙이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관개시설물 중에서 역사적 예술적 사회적 가치가 높아 보호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코로나19로 참 힘든 시간을 겪고 있다. 둠벙은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했던 선조들의 지혜로 우리를 인도해주는 열쇠다. 가뭄과 역병을 이겨냈던 조상들의 식견과 의지를 둠벙에서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

다행히, 고성군이 둠벙 보전과 다원적 가치 창출을 위해 행정 및 주민 조직으로 구성된 TF팀을 운영 중이라고 한다. 둠벙이 공동체 문화와 생태적·역사적 가치 등 다양한 관점에서 미래 유산으로 자리잡기를 기대한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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