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885. 아쉬워라 표준사전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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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교열부장

*존폐(存廢): 존속과 폐지를 아울러 이르는 말.(기구의 존폐를 논하다./금융 위기가 닥치자 우리 회사는 존폐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에 실린 뜻풀이다. 한데, 보기글에 나온 ‘존폐의 위기’는 말이 안 된다. ‘존폐’는 ‘존속과 폐지’를 아울러 가리키는데, 폐지라면 몰라도 존속이 위기일 수는 없기 때문. 그러니 보기글은 ‘우리 회사는 폐지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우리 회사는 문 닫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쯤이라야 했다. 굳이 ‘존폐’를 쓰고 싶다면 ‘존폐의 기로’ 정도면 될 터.

존폐와 비슷한 ‘존망’ 또한 마찬가지여서 ‘존망의 위기’라고 하면 안 된다. 아래는 표준사전 뜻풀이.

*존망(存亡): 존속과 멸망 또는 생존과 사망을 아울러 이르는 말.(국가의 존망은 젊은이들의 손에 달려 있다./이것은 당신의 존망이 걸린 문제입니다.)

이처럼 ‘아울러 이르는 말’을 쓸 땐 과잉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표준사전을 보자.

*여부(與否): 그러함과 그러하지 아니함.(사실 여부를 확인하다./생사 여부를 묻다./먼저 도착한 가족들은 아들, 남편,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생사 여부를 알려고 아우성쳤다.<유현종, 들불>)

‘여부’가 그러함과 그러하지 아니함을 아우르는 말이므로 뜻풀이에 나온 ‘사실 여부’는 ‘사실이냐, 아니냐’이므로 말이 된다. 하지만 ‘생사 여부’는 ‘생사’와 ‘여부’가 각각이므로 경우의 수가 ‘생-여, 생-부, 사-여, 사-부’로 4가지나 되는 것.(게다가 ‘생-여, 사-부’와 ‘생-부, 사-여’는 같은 뜻이다.) 뭘 저리 복잡하게 물어야 할까. 그냥 ‘생사’만 묻거나 ‘살았는지 여부’, 혹은 ‘살았는지’만 물으면 될 터인데….

호박, 박, 가지, 고구마 따위를 납작납작하거나 잘고 길게 썰어 말린 건 ‘고지’라 한다. 한데, 표준사전의 이런 뜻풀이는 이상하다.

*박고지: 여물지 아니한 박의 속을 파내어 길게 오려서 말린 반찬거리.

이러면, 박고지 재료는 씨가 박혀 있는 하얀 부분, 즉 ‘박속’이 된다. 하지만, 얇게 썰거나 길게 오려서 말리는 건 속을 파내고 남은 부분인 것. 박속은 그냥 긁어내 버리는 게 보통이다. 그러니 표준사전 뜻풀이는 이래야 했다.

*박고지: 여물지 아니한 박을 속을 빼버린 다음 오려서 말린 반찬거리.(<우리말 큰사전> 한글학회)

*박고지: 박의 속을 빼어 버리고 길게 오려서 말린 반찬거리.(<국어대사전> 민중서림)

사전이 발행된 해를 생각하면 표준사전은 뒷걸음질을 친 셈.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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