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도 말도 똥차도 덤덤히 품어 준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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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함께하는 고개와 길] 694. 대티고개

대티고개 전경. 서대신동과 괴정을 잇는 대티고개는 사람도 다니고 말도 다닌 길이었다. 괴정 일대에 나라에서 말을 키우고 관리하던 국마성(國馬城)이 있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대티는 대범하다. 선이 굵다. 선이 굵어서 일희일비 그러지 않는다. 좋을 때도 덤덤하고 안 좋을 때도 덤덤하다. 좋다고 방방거리고 안 좋다고 질질거리는 나에게 대티는 과분한 고개. 걸은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등짝에 땀이 배고 숨이 찬다.

좋았던 때를 생각한다. 대티가 좋았던 그때. 대티는 로마였다. 모든 길이 대티로 모였고 모든 길이 대티에서 비롯했다. 대티는 길의 처음이자 정점이었다. 100년 전, 200년 전 그때는 지도마다 대티를 떠받들었다. 지도마다 ‘대치, 대치’ 그랬다.

서구 서대신동과 사하구 괴정동 사이
모든 길이 모이던 높다란 고개 ‘대치’
괴정 일대는 나라 말 키우던 ‘국마성’
사람도 말도 헉헉거리며 오른 길
분뇨처리장 구린내 바람막이 역할
부산 시내 사람은 감사함 가져야

대치는 대티 한자어. 큰 대(大) 언덕 치(峙)를 썼다. 우뚝 솟은 언덕, 또는 높다란 고개였다. 대치에 들어선 마을 대치리도 큼지막했다. 집은 아랫마을 괴정보다 많았고 당리보다 많았다. 장림은 대치 절반도 되지 않았다. 1904년 가구 수는 대치가 42, 괴정이 35, 당리 18, 장림 20이었다.

“말도 말우. 여기 지날 때는 코를 싸매야 했으니.” 대티가 안 좋았을 때는 똥 구린내가 진동했다. 컨테이너선(船) 선장 출신인 이성훈 도시항해 선장에게도 그랬다. 고교 동기인 이 선장은 집과 학교 사이에 이 고개가 있어 하루 두 차례 오르내렸다. 초입은 괜찮다가도 고갯마루에 서면 그때부터 코를 싸매야 할 만큼 구린내가 진동했다.

대티는 서구 서대신동과 사하구 괴정동 사이 고개. 괴정동 쪽에 분뇨처분장, 그러니까 분뇨처리시설이 있었다. 부산 시내에서 나온 똥물을 가득 실은 똥차가 매일매일 대티를 지나 괴정 분뇨처분장에 이르렀다. 똥물은 시멘트 하수관을 타고 하단 오거리 똥다리까지 갔다.

‘위생약국, 삼육부산병원.’ 서대신동 방면 대티고개 초입에서 만나는 약국 이름이고 병원 이름이다. 약국과 병원 이름이 따로 논다. 왜 그럴까. 삼육병원 자리에 원래는 부산위생병원이 있었다. 부산에 큰 병원이 별로 없던 시절, 위생병원은 부산의 약손이었다.

“아, 그 병원!” 연세 지긋한 분은 위생병원 이름을 들으면 열에 아홉 향수에 젖는다. 고마운 감정일 수도 있겠다. 다들 못 먹고 못 입던 그때 이 병원 의료진은 어버이였고 누이였다. 한국전쟁이 나자 국제연합과 교회가 나서서 서구 부용동에 1951년 세운 서울위생병원 부산분원이 전신이다. 1954년 지금 자리에 신축해 이전했고 이듬해 부산위생병원이란 제대로 된 이름을 얻었다. 2015년 삼육부산병원으로 개칭했다.

고갯길은 초장부터 경사가 꽤 급하다. 위생병원 지나면서는 숨소리가 고르지 않다. 포장된 지금도 숨이 찬데 그 옛날은 오죽했을까. 사람도 헉헉댔고 말도 헉헉댔으리라. 대티고개는 사람도 다니고 말도 다닌 길이었다. 괴정 일대는 나라에서 말을 키우고 관리하던 국마성(國馬城)이었다. 동주대 뒷산에 국마성 돌담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부산박물관이 2016년 펴낸 <부산의 성곽>에 돌담 사진이 나온다.

‘여기 아름다운 승학산 기슭, 반세기 동안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던….’ 초장부터 급한 고갯길은 협성 아파트단지에서 꺾인다. 아파트단지 초입 빗돌은 아파트 자리에 동아고등학교가 있었다고 밝힌다. 동아고. 반가운 이름이다. 내 모교가 근처에 있어 고교 시절 신경전을 꽤나 벌였던 기억이 난다.

오르막 고갯길이 한참 이어진다. 고개가 시작하는 도시철도 1호선 서대신역에서 고갯마루까지 버스 정류장이 네댓이나 된다. 보통은 하나, 기껏해야 둘인데 대티고개는 그 두 배다. 역시 대범하고 선이 굵다. 2차선 포장도로로 변한 고갯길 이쪽은 대단지 아파트 공사장을 가린 철제 담벼락. 좋았을 때도 덤덤했고 안 좋았을 때도 덤덤했던 대티고개는 여전히 덤덤하다. 그러나 철제 담벼락이 시야를 막은 지금은 그 속이 어떨지 가늠조차 안 된다.

길이 갈라진다. 고갯길 가장 높은 데를 열 걸음, 스무 걸음 남겨두고 이쪽으로 가면 감천이고 저리 가면 괴정이다. 일종의 삼거리다. 감천 방향 길가에는 가게가 나란히 보인다. 그런데 간판이 좀 이색적이다. 고분도리 총각손맛, 고분도리 카페, 고분도리 협동조합. 온통 고분도리다.

“나무 바구니 같은 것 있잖아요, 고리짝. 여기가 고리짝 만들던 마을이래요. 그래서 고분도리라고 한다네요.” 아리송은 하지만 이해는 된다. 그러려니 넘어간다. 고분도리 카페에서 땀을 식히며 들은 설명은 아무튼 그랬다. 카페 입구 안내판은 서대신동 옛 지명이 고분도리라고 그런다. ‘고불’은 고리짝, ‘드르’는 들이니 ‘고리짝 만드는 들’이 고분도리란다.

드디어 고갯마루. 급하게 휘어졌고 산비탈에 가려서 고갯마루 저쪽은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산비탈 경사진 면에 방부목 계단을 놓아 안전하게 다니도록 했다. 계단을 오르자 옛날부터 있었지 싶은 나지막한 마을, 옛날부터 있었지 싶은 가느다란 골목길이 나타난다. 옛날부터 살았다는 아흔 할머니는 가느다란 골목길 저리 곧장 가면 대신동 꽃마을이고 이리 내려가면 괴정이라며 말 보시한다.

‘시악산 천마다리.’ 마을 앞에 놓인 다리 이름이다. 말 조형물 장식이 다리 난간에 달려 있다. 옛 마을이 들어선 시악산과 하늘의 말 천마를 품은 다리다. 함께 나선 이성훈 선장 표정에 감회가 어린다. 돼지 사료 가득 실은 마차가 표정에 어리고 말 탄 기마경찰이 표정에 어린다. 어릴 때 풍경들이다.

괴정으로 이어지는 내리막길. 수월하다. 평지까지는 한달음인데 이 선장이 딱 멈춘다. 또 감회 어린 표정이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나. 여기가 어디라고 밝히면 아파트며 대지가 똥값 될지 모르니 어디라고 밝히지는 말아 달란다. 덩치는 산인데 속은 비단이다. 이 선장이 선 곳은 분뇨처분장 자리. 2차선 저쪽은 똥물 채우던 처분장이었고 이쪽은 똥차 대기소였다. 여기서부터 하수관을 놓아서 하단 오거리까지 흘려보냈다.

부산 시내 사람은 대티고개 지날 때면 고개를 숙여야 한다. 고마워서라도 그래야 하고 미안해서라도 그래야 한다. 똥 구린내 다 막아준 고개였고 똥물 다 받아준 사하였다. 대티고개가 바람막이가 되어주지 않았다면, 사하의 땅과 사하의 사람이 받아주지 않았다면 어느 누가 그걸 감내했을 것인가. 당신이 그랬을 것인가, 내가 그랬을 것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대티고개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역시 대범하다.

▶가는 길=도시철도 1호선 서대신역 3번 출구로 나와 약국 옆 오르막길로 곧장 가면 된다. 고갯길 끝은 도시철도 대티역이다. 시내버스 2번, 96번, 113번과 서구 마을버스 3번과 3-1번이 다닌다. dgs1116@hanmail.net
대티고개 천마다리(위), 위생약국과 부산삼육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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