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더 야속한 여성들의 고군분투 여럿이 함께하는 연대로 변화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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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의 여성 10인이 되돌아본 2020년

코로나로 시작해 코로나로 끝나는 2020년. 여성들은 의료나 복지, 교육 영역의 최전선에서 재난의 충격을 마주했고, 일상에서는 늘어난 돌봄 부담으로 이중고를 겪었다. 팬데믹이 기존의 젠더 불평등을 더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게 유엔의 진단이다. 20대부터 70대까지, 간호사부터 전업주부까지, 저마다의 무대에서 고군분투한 우리 곁의 여성 10명의 이야기로 일 년을 돌아보기로 한 것은 그 때문이다. 정책이나 통계로 뭉뚱그려지지 않는 한 명 한 명의 목소리는 다른듯 흘러가다가 자주 포개졌다.

코로나로 시작해 코로나로 끝난 올해, 여성은 돌봄부담 이중고
20대 SNS 담당 공무원부터 문 닫은 복지관이 야속한 70대까지
나이·직업 불문한 10인의 공통 소망은 공감과 연결에 대한 바람


등교 수업이 멈췄다. 이점호(45) 씨의 전쟁이 시작됐다. 첫째는 올 초 입대했지만, 고3 수험생 아들과 고1 막내딸이 있었다. 학생도 교사도 처음 해보는 온라인수업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도, 식구들 삼시 세끼 식사부터 간식까지 챙기는 일도 쉽지 않았다. 초창기 마스크나 손소독제를 구하느라 곳곳에 흩어 사는 이 씨의 7남매가 작전짜듯 수급을 체크해서 서로 품앗이를 했다. 가족끼리 왕래를 못 하는 것도 힘들었다. 지난달에는 7남매가 매년 모여 하던 합동김장 대신 이 씨 혼자 경남 산청에 계신 부모님과 꼬박 사흘 동안 김장을 350포기나 담갔다. 아이들이 집에 있으니 집집마다 김치가 바닥이 났다. 동네 어르신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복지관이 멈췄다. 이정순(76) 씨는 불행해졌다. 매일 서예 수업도 듣고, 식당 봉사활동도 하던 복지관을 못 가니 병이 다 나는 것 같았다. 너무 아쉬워서 복지관 마당에서 한동안 서 있다 오고 했다. 직원들이 잠깐 들어왔다 가라고 해도 혹시나 피해 줄까 싶어 손사래를 쳤다. 도중에 잠시 상황이 좋아져 복지관이 다시 문을 열었을 때는 날아갈듯 기뻤다. 그래도 나라에서 위험하다고 해서 좋아하던 달목욕도 안 가고 금정산 남문도 슬슬 걷고 그런대로 해냈다. 엊그제 복지관에서 같이 탁구치던 한 살 위 친구가 심장마비로 갔다는 소식에 마음이 허전하고 아팠다. 얼른 코로나가 물러가서 보고 싶은 분들 좀 봤으면 하는 게 바람이다.

필라테스센터 리에이치필라테스는 잠정 휴관했다. 부산시가 이달 15일부터 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를 시행하면서 실내 체육시설에 2주간 운영 중단을 권고했다. 서보연(33) 대표는 며칠 전 스트레스성 급성 위장염으로 응급실 신세를 졌다. 재활병원 근무를 접고 지난해 일대일 센터를 열었고 올 1월 그룹실을 추가로 열자마자 코로나가 터졌다. 그래도 하루 12시간을 쉬지 않고 일하면서 9월에는 이제 자리를 잡았구나 생각했는데 12월 들어 사실상 모든 강습이 중단됐다. 월세나 관리비는 중단이 없다. 조금만 더 버티자고 마음을 다잡다가도 계속되는 회원들의 환불 요청에 상황이 나아질 수 있을까 두렵다. 절대 잊을 수 없는 한 해가 될 것 같다.

베이커리카페 꼼빠뇽은 다시 문을 열었다. 황은미(35) 씨가 남자친구와 함께 2012년 부산진구 전포동에서 6년을 운영하던 가게다. 젠트리피케이션에 내몰려 1년을 싸웠고, 소상공인대출을 위해 1년간 교육을 받아 올 9월 범일동에서 새출발을 했는데, 상황이 최악이었다. 코로나에, 외진 상권에, 인테리어 업자는 하자를 두고 잠적했다. 극단적인 선택을 떠올릴 정도로 힘들었지만, 죽을 때까지 빵쟁이로 살겠다는 목표는 뚜렷했다. 황 씨는 또다른 브런치카페의 관리자로 취업해 오픈 준비에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꼼빠뇽은 남자친구가 지키고 있다. 여유 있는 사람이 더 버티는 상황이 허무하지만, 뭐라도 하면서 살아남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학교는 멈추지 않았다. 동백초등학교 장병순(50) 보건교사는 더 바빠졌다. 학사일정부터 생활지도까지 거리 두기를 중심으로 돌아갔고,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 보건교사가 필요했다. 비대면수업에서 모니터를 통해 학부모에게 모든 것이 노출되고 평가받는 상황에 교사들은 바짝 긴장했고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 번 등교수업을 하는 날은 35분 단축수업 안에 전달사항을 전하느라 하루가 폭풍처럼 지나갔다. 특히 30~40대 여선생님들은 자녀 돌봄과 학교 업무라는 두 가지 과제에 이중, 삼중고를 호소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선생님과 마스크 쓰기나 거리 두기를 약속하면 정말 잘 참고 잘 지킨다. 특히 1, 2학년들은 어른들이 보고 배워야 할 정도다.

부산시청 SNS도 잠들지 못했다. 부산시청 뉴미디어담당관 SNS 소통팀의 이민경(29) 주무관은 쉽고 친절하게 정보 전달을 하려고 늘 고민했다. 인스타그램에 부산 코로나19 환자 현황판을 한 장의 이미지로 제작해 올리자고 제안했다. 흩어진 정보를 직접 요청해서 취합했고, 시민들의 질문에는 담당부서로 확인해 실시간 답변을 달았다. 밤낮없는 소통을 칭찬한 시민들의 추천으로 친절 공무원에 선정되기도 했다. 부산시청 공식 인스타그램 구독자는 4만 명에서 17만 명으로 뛰었다. 식당용 방역수칙 포스터 6종을 만들어 배포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공무원 2년 차, 공무원 DNA가 없는 걸까 걱정하던 때도 있었는데, 이제 정말 공무원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배정희(60) 씨는 38년 차 간호사다. 부산의료원 간호부장을 끝으로 정년퇴직 전 7월부터 공로연수 중이다. 2월 아시아드요양병원 코호트(동일집단) 격리는 다행히 추가 확진자 없이 끝났지만, 지금도 진행 중인 요양병원 집단감염을 보면 방호복과 고글, 마스크에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 고생하고 있을 간호사들을 두고 온 것 같아 미안한 마음뿐이다. 의료원 간호사 한 명이 안타깝게 확진되고 나머지 간호사들이 격리된 상태로 잠복기를 기다릴 때는 간호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긴장감에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시민들의 응원에는 힘이 났지만, 영웅이라는 찬사는 오래 가지 않는 걸 안다. 더 필요한 것은 후배들이 자부심을 갖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이다.

이경임(58) 씨는 5년 차 요양보호사다. 봉사활동으로 시작한 돌봄이 직업이 됐다. 처음부터 여든 넷 어르신 한 분을 줄곧 돌봤는데 어르신이 코로나에 걸리면 내 탓일까 싶어 마트도 안 가고 엘리베이터도 잘 안 탄다. 이전에는 보행보조기를 끌고 잠시 바깥 바람도 쐤는데 어르신과 둘이 집에만 있으려니 답답하다. 어르신도 기력이 더 떨어지시는 것 같아 걱정이다. 힘들 때도 있지만 어르신이 워낙 이 씨를 믿고 의지하니 책임감을 느낀다. 이웃들이 누구냐고 물으면 질녀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찾아오는 가족 없는 어르신 어깨에 힘이 실리는 느낌이다. 내년에는 어르신도 건강하고 배정시간도 좀 더 넉넉해져서 꾸준하게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

부산여성단체연합 임은경(57) 사무처장의 2020년은 개인이자 간호사 임은경이 여성이라는 연대를 위해 일하는 활동가로 다시 태어난 해다. 25년 동안 주로 여성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의료계 젠더 차별에 관심을 갖고 여성학 석사 공부를 했고, 올 초 부산여성단체연합 사무처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사태로 아동병원 간호사를 그만두고 전업 활동가가 된 뒤에는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행과 사퇴, n번방과 디지털 성범죄, 낙태죄 개정 운동 같은 젠더이슈의 현장을 지켰다. 임 사무처장은 바위처럼 변하지 않는 부산시나 정부가 답답하지만 사명감을 갖고 애쓰는 활동가들을 보면서 이제는 정말 변화해야 한다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라고 느낀다.

뮤지션 박주영(31) 씨의 2020년은 지역의 동료 여성 뮤지션과 또래 여성들에게 손을 내민 해다. 멤버의 결혼과 타 지역 이주로 밴드를 해체하고 사무직으로 일했지만, 부산여성뮤지션 프로젝트 ‘반했나’ 기획자이자 멤버로서 모두 7팀을 불러 모아 11월 싱글 ‘걷는 길을 좋아하고 나의 선택을 사랑해’를 발매했다. 반했나 프로젝트는 2013년과 2018년에 이어 세 번째. 공연과 축제 취소에다 불안한 일자리와 가중된 가사노동으로 더욱 힘겹게 버티고 있을 동료 뮤지션들을 하나의 노래로 연결하고 싶었다. 젊은 여성들의 자살률이 급증했다는 뉴스를 보며 고립된 일상 속에서 우울해하는 또래 여성들에게 노래로 말을 건네고 싶었다. 어렵게 열린 발매 기념 공연의 박수 소리는 유난히 힘차고 길었다.



10명의 여성들은 나이도, 선 자리도 모두 달랐지만 공감과 연결에 대한 바람은 비슷했다. 서보연 대표는 내년에는 마스크를 벗고 회원들의 표정을 보면서 필라테스 동작을 알려 줄 수 있었으면 한다. 이점호 씨는 다시 7남매가 모이는 날과 중단했던 봉사활동을 시작할 날을 기다린다. 이민경 주무관은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 시민들을 만나는 새로운 업무를 기대하고 있다.

새로운 일상은 이전과는 달라야 한다는 희망도 크다. 장밋빛 전망이라기보다 절박해서 더욱 간절한 기대다. 장병순 교사는 차별과 혐오에 대한 감수성, 돌봄에 대한 감각이 요구되는 코로나 이후 학교에서 여성 교사들의 역할이 커질 수 있다고 믿는다. 박주영 씨는 더 많은 뮤지션들이 서는 여성뮤지션 페스티벌을 꿈꾸고 있다.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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