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수의 소설과 세상] 연민이란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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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밀다원시대 문학축제 운영위원장

아메리카 인디언 중 크리크족은 ‘12월’을 ‘침묵하는 달’로 불렀다고 한다. 이는 좌충우돌하며 분주하게 살았던 한 해를 되돌아보며 조용히 자성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은 수그러들 기미 없이 점점 위험 상태로 치닫고 있고,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은 숟가락 차고 거리로 내몰릴 지경이다. 그럼에도 진영논리에 휩쓸려 서로 상대에 대한 혐오만 무차별로 난사하는 오늘의 정치판을 보면, 과연 그들은 올해의 12월을 어떻게 불렀을지 궁금해진다.

모든 시선을 안으로 거두고 조용히 지내기엔 우선 코로나 상황이 심상찮다. 영국은 지난 8일, 미국은 14일부터 백신 접종이 시작됐고 캐나다와 일본 등 몇 나라에서는 연내 접종이 가능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우리의 처지는 사뭇 다르다. 선구매 계약을 체결해 1000만 명분을 확보했다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아직 임상 3상 시험 중에 있어 언제 승인이 날지 모르는 상황이고, 구매 확정서와 공급 확약서만 쓴 다른 2종의 백신은 제조사의 공급 처분만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만약 이들 나라의 접종이 부작용 없이 완료된다면, 그들이 국민 면역에 성공하는 동안 K-방역 모범국가인 우리는 여전히 마스크 쓰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주문처럼 외며 불안에 떨어야 할 것이다.

코로나 악화일로 서민들 삶 갈수록 피폐
정치판은 관용이란 없고 증오만 가득
꿈과 이상도 집단논리 매몰 땐 희망 없어
연민과 사랑의 메시지가 절실한 연말…

이렇게 보이지 않는 적에 포위당한 채 전전긍긍해야 하는 서민들의 삶은 시간이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다. 은행 신용대출 창구 앞을 서성이는 이들의 모습은 처절하다. 그런데도 그들을 위무하고 희망을 약속해야 할 정치는 광인 활극도 모자라 이제 목불인견의 도를 넘은 듯하다.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다는 경고음이 비명처럼 들린다. 민주적 가치인 관용과 타협은 장롱 속에 넣어둔 헌 옷처럼 너절해졌고 날 선 증오와 배제만 증폭하는 선동·선전의 깃발만 요란스럽게 나부낀다.

공영 사회를 해치는 잘못된 관습과 제도는 마땅히 개혁해야 한다. 그래야만 역사의 진보를 기약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이란 미명도 절차적 민주주의를 무시하면 공정성 면에서 비난받게 된다. “내게 단 두 줄의 글만 보여라. 그러면 그 필자를 사형시킬 꼬투리를 잡을 수 있다.” 프랑스 루이 13세의 절대왕정을 확립한 재상 리슐리외가 한 말이다. 그는 이런 행위를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히 자행하면서 수많은 정적을 제거했다. 다수당을 확보해 절대 권력을 얻게 된 위정자가 법원까지 수사하고 기소할 수 있는 막강 공수처의 권한마저 쥐게 된다면 이는 민주주의 제도 파괴를 넘어 전제정치로 직행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자기를 감시하는 공수처의 칼날이 코앞에서 번득이는데 누가 함부로 나서 삼권분립을 외치고 견제와 균형을 말할 수 있을까. 사찰을 방지하기 위해 또 다른 사찰 기구를 만든다는 자체가 집단 기만극에 지나지 않는다.

문득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내용이 상기된다. 농장 주인을 쫓아내고 정적인 돼지 스노볼까지 제거한 돼지 나폴레옹은 사나운 개를 거느리고 연단에 올라 이렇게 외친다. “이제부터 농장 작업에 관련된 모든 문제는 내가 주재하는 돼지들의 특별위원회에서 결정하고 처리한다. 특별위원회는 비공개적으로 만날 것이며 거기서 결정된 사항은 다른 동물들에게 일방적으로 통보될 것이다. 일체의 토론은 생략한다.” 연설이 끝난 후 뭐든 일이 잘못되면 정적으로 제거했던 “스노볼이 그랬다”가 연창되기 시작한다. 창문이 깨지거나 배수구가 막혀도 꼭 누군가가 나서서 지난밤 스노볼이 들어와서 그랬다고 말한다. 이는 어디서 많이 듣고 보던 익숙한 풍경이 아닌가. 결국 돼지들은 혁명 초기 제 1구호였던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를 ‘하지만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로 바꾸게 된다.

권력은 불이다. 음식을 익히고 방을 데워 따뜻한 겨울을 지내게 할 수 있지만, 재산을 한순간에 태워 잿더미로 만들 수 있다. 심지어 너무 가까이하다 자신마저 태워버릴 수도 있다. 이념이나 정파도 마찬가지다.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꿈은 서로 한결같다. 하지만 그들이 집단논리의 도그마에 빠지는 순간, 멀쩡했던 사람도 사나운 전사로 만드는 역사적 사례들을 숱하게 보아 왔고 그 이면에는 이를 교묘히 이용하고 조장하는 위선적 권력자들이 있었음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현재의 불안이 누적될수록 서로를 배려하는 따뜻한 연민의 이야기가 새삼 그리워진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 시계를 팔아 빗을 사고, 아내는 남편을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시곗줄을 사는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그것이다. 저물어가는 연말, 상대를 향한 연민이 모두에게 구원의 메시지가 되길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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