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삼의 타초경사(打草驚蛇)] 산타클로스는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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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대 자유전공학부 특임교수

지지난해 이즈음 출근길 아파트 승강기 안에서다. 유치원 가는 아이들이 올라탔다. 요즘은 예쁘지 않은 아이가 없다. 먹고사는 것이 윤택해진 덕이겠는데 내 나이 탓도 있으리라. 자연히 할아버지 웃음이 입가에 솟는다. 조용한 공간이 실없어 꼬마 아가씨에게 희떱게 물었다.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생각하니?” 손가락으로 여섯 살이라고 밝힌 아가씨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깜빡거리며 어리석은 저 영감을 꼭 설득하겠다는 듯 확신에 차 말했다. “산타클로스는 있어요!” 되물었다. 어째서 그러냐고. “아빠랑 놀이동산에 갔을 때, 직접 눈으로 보았다”고 한다. 옆에 선 할머니는 손녀가 사랑스러운 듯 호호 웃었다.

얼마 전 꼬마 아가씨를 다시 만났다. 마스크를 썼지만 금방 알아보겠더라. 인사 삼아 또 물었다.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생각하니?” 그때보다 좀 그늘진, 아니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제 할머니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선생님이 산타 할아버지로 분장을 하더라.” 그러니까 이젠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말씀이렷다.

일곱 살만 돼도 산타가 없다는 걸 알지만
직접 산타가 되어 보면 의미는 달라져
‘내로남불’도 중층의 시각이 겹친 언어
사태의 주체가 되어 내면의 목청 성찰해야

대여섯 살 먹은 아이에겐 분명히 산타클로스가 있다. 눈으로 똑바로 봤다고 하지 않던가! 그것이 일곱 살만 돼도 산타클로스는 없다. 그 후로는 산타가 없다는 것을 ‘사실’로 알고 살아간다. 지금 어린 꿈을 짓밟지 말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과연 어느 것이 진짜 사실인가를 묻고 싶다.

산타클로스는 있는가, 없는가. 없다고? 그렇다면 어째서 해마다 12월이면 산타는 출몰하는가? 올해는 최고 과학자까지 나서서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자신하지 않았나? 언론 보도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미국 코로나 방역 최전선에 서 있는 앤서니 파우치 국립 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 소장이 지난 19일(현지시간) CNN 어린이 대상 토크쇼에 출연해 “어린이 여러분이 실망할 것 같아서 얼마 전 북극으로 가서 산타클로스에게 코로나19 백신 주사를 직접 놓았다”면서 “산타가 전 세계로 떠나도 좋을 만큼 면역력이 좋았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소식통에 따르면 ‘24일 밤에 도착하려고 산타는 이미 10일에 출발했다’(코로나 때문에 14일을 대기해야 하니까)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세월이라는 변수를 ‘있고’ ‘없고’의 사이에 집어넣으면 산타클로스는 묘하게 변신한다. 일곱 살 이후 ‘산타는 없다’는 사실을 진실로 알고 평생을 살다가 막상 내가 노인이 되면, 즉 승강기에서 만난 눈이 초롱한 손녀의 할아비가 되면, 붉은 옷을 껴입고 솜으로 수염을 달면서 산타로 변신하려고 애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리라. 이젠 내가 산타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찌 있기만 하고 혹은 없기만 하겠는가? 산타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또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산타는 이미 하나가 아니다. 이제 셋이다.

해마다 연말이면 교수님들이 사자성어로 한 해를 요약하는 행사를 해왔다. 올해의 사자성어는 ‘아시타비(我是他非)’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렸다는 이른바 ‘내로남불’을 한자어로 옮긴 것이란다. 내로남불은, 남이 할 때는 비난하던 행위를 자신이 할 때는 합리화하는 태도인데 요약하면 ‘남 탓’이다. 올해의 사회 현상으로 내로남불이 선택된 사정은 이해된다. 눈에 떠오르는 장면도 여럿이다.

그런데 이 말이 처음 출현한 것은 이미 1990년대 정치권에서다. 그러니까 근 20년 동안 우리는 내로남불을 아미타불 외듯이 읊어 왔던 셈이다. 올해의 사자성어로 꼬집은 것이 아시타비의 표면이라면, 그 말 밑에 쌓인 20년 세월은 속살이다. 그런데 그 아래 겹이 또 있다. 올해를 ‘내로남불’이라고 비평하고 선정한 교수님들의 실존적 내로남불이 또 한 겹이다. 산타클로스도, 내로남불도 세 겹으로 이뤄져 있다. 나는 객관적이라며 사태의 바깥으로 물러나서 비평자로 자처하고서 그 속을 손가락질하고 비아냥거리기만 하면, 20년이 지나도 사태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배움을 얻자. 말은 겉면만 있지 않고 적어도 세 겹으로 이뤄져 있다. 내 말은 함부로 하지 말 것이며 남의 말도 겉치레로 들어 휘감기지 말 일이다. 또 산타가 존재하는 이유는 누군가 산타가 되기 때문이라는 실존적 사정에 주의하자. 마찬가지로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계속 떠도는 까닭은 남의 일처럼 비평할 뿐 로맨스와 불륜의 사이에 칼을 집어넣어 구분하는 사업을 하지 않기 때문임도 배우자.

산타는 어디 있는가. 내 속에 있다. 내가 산타가 되기에 산타는 계속 살아 있다. 내로남불은 어디 있는가. 내 안에 있다. 내가 남 탓하고 비아냥대기만 하기에 그 말이 살아 있다. 새해엔 손가락을 내 쪽으로 돌려 나의 탓을 찾자. 로맨스와 불륜의 사이는 깊고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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