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즐거운 1층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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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민 종합건축사사무소 효원 대표

삼십몇 층의 높이에서 안개 낀 아침을 맞은 적이 있다. 커튼을 젖히자 시계 제로. 형태와 색이 존재하지 않는 허공에 둘러싸인 경험은 특이했다. 공간감의 상실인지 새로운 공간 체험인지 모호한 상태였다 할까? 현기증 속에서 몇십 분을 지나자 묘한 공허가 몸을 휩싸고 돌았다. 메스꺼움은 오래갔고, 기분은 안개 낀 겨울 날씨 같았다. 고층 주거를 비판하게 된 하나의 계기였다.

요 며칠간 겪은 반대의 경험은 주장을 더 확신하게 한다. 고층에서 내려와 1층에서 생활한 보름의 경험은 특별했다. 사랑하는 손녀와 꿈같은 시간을 보낸 것도 큰 이유이겠지만, 땅과 가까이 한 안온함 때문이기도 했다. 마치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할까? 굳었던 몸이 풀리고 산란한 정신이 제자리를 잡은 듯했다. 둘째 손자의 출산이 만들어 준 의외의 행복이 우리 부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아들 내외가 이사한 집이 아파트 1층이었고, 층간 소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을 먼저 꼽았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흙에 가까워진 것이 아이들에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1층서 생활한 보름의 경험 특별
손자 출산이 만들어 준 의외의 행복
부모님과 함께했던 집 감촉 느껴
 
아파트 분양서 아직은 ‘우선’ 아니지만
저층 공간, 언젠가 진가 회복할 것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들어가게 된 집. 문을 여니 아이가 폴짝폴짝 뛰며 달려온다. 제 아비의 바람대로 층간소음 눈치 보지 않는 아이의 표정이 밝다. 오호라! 이것은 오래전 내 부모와 함께 살던 집의 감촉이 아닌가. 순간 지난여름 태풍에 집이 흔들리던 때와 같은 감각의 긴장이 일시에 이완되는 것을 느꼈다. 잠자리가 바뀌었음에도 깊이 잠들었다.

밤새 눈이 왔나 보다. 창문을 여니 하얀 적막 속에 눈가루가 흩날린다. 아무런 침입의 흔적이 없는 눈의 평온을 오랜만에 본다. 손녀가 내 곁에 선다. 동화책 속에서나 보았던 광경이 실제로 제 앞에서 펼쳐지니, 혹 겨울왕국의 엘사공주를 기다리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아이와 나무, 그리고 눈이 정적 속에 수평을 이루었고,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아이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와! 눈이다.”

시간이 지나자 아파트의 아이들이 하나둘 모이고, 눈을 던지고 굴리기에 여념이 없다. 아이들은 눈사람도 만들어, 마치 우리 식구들에게 선물이라도 하려는 듯 집 앞 느티나무 아래로 옮겨 놓았다. 유리창 너머로 얼굴 없는 눈사람이 집을 들여다본다. 나는 종일 설레었다. 숯 대신 색이 짙은 나뭇가지로 눈과 귀를 만들면 되겠지? 모자는 종이 박스로 만들고, 마른 나뭇가지를 꺾어 두 팔도 만들어 주어야겠어. 오래전 동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그날 저녁 손녀 몰래 나무 밑으로 가 눈사람의 눈과 코와 눈썹을 만들고 모자를 씌웠다.

다음 날 아침 아이를 서둘러 깨워 창가로 데려갔다. 커튼을 걷자 이젠 완벽한 모습의 하얀 눈사람이 아이를 향해 웃고 있었다. 어느새 까치 두 마리가 날아와 나뭇가지에 앉았고. 아이는 “할아버지! 까치도 왔어요.” 하고 어제보다 더 크게 외쳤다. 내가 그린 풍경은 완벽했다. 이번엔 눈사람과 까치가 합세해 우리와 함께 느티나무 아래에서 수평을 이룬다. 이보다 더 평온한 겨울 그림은 없겠지? 하늘을 보며 오늘도 하얀 눈이 내렸으면 했다. 아이도 까치도 그럴 것이었다.

손녀 돌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하얀 종이에 동화 같은 그림을 그릴테다. 아이들이 웅성거려 잠을 깨면 밖은 온통 눈이고, 까치가 겁 없이 창문을 두드리는 그런 수평의 풍경을. 몇 마디의 말도 덧붙여 놓겠다. “여러분! 여기는 1층입니다. 이번 겨울 며칠을 이렇게 사람답게 보냈습니다.”

아파트 분양에서 1층을 비롯한 저층은 여전히 우선순위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저층의 공간들이 언젠가 진가를 회복할 것이라 믿는다. 그러한 징후를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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