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전국의 수영(水營) ‘자매결연’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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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 민주평통자문회의 부산수영구협의회장

선친은 수영본동 토박이였다. 살아생전 토박이란 자부심이 대단했다. 토박이란 자부심은 수영이 조선 시대 국경을 지키던 군사도시라는 데서 비롯했다. 그랬다. 수영은 조선 시대 수군이 주둔하던 군사 요충지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부산은 일본과 맞댄 국경이었다. 호시탐탐 국경을 넘보는 일본의 일거수일투족을 탐지하며 부산을 지키고 나라를 지킨 충절의 도시가 수영이었다.

수영이란 지명 역시 군사용어였다. 수군절도사영을 줄여 수영(水營)이라 했다. 조선 시대는 오늘날 해군에 해당하는 수군의 주둔지를 수영이라 했고 육군의 주둔지를 병영(兵營)이라 했다. 그래서 전국 곳곳에 수영이 있었고 전국 곳곳에 병영이 있었다. 인터넷에서 수영과 병영을 검색하면 그러한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수영은 조선팔도 모두에 있었다. 하삼도(下三道)라 해서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에 있었고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에 모두 다 있었다.

다른 도는 수영이 한 군데였지만 경상도와 전라도 양도는 두 군데였다. 조선은 중국과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인 반면 일본과는 늘 긴장 관계였다. 일본과 가까운 양도에 두 군데 수영을 둔 이유였다.

경상도 두 군데 수영은 부산 수영구와 경남 통영시에 두었다. 수영이 군사용어이듯 통영 또한 군사용어다. 수군통제사영을 줄인 말이 통영(統營)이다.

부산 수영과 경남 통영은 낙동강을 가운데 두고 경상도 이쪽저쪽을 방어했다. 수영은 낙동강에서 경북 끄트머리까지, 통영은 낙동강에서 섬진강까지 맡았다. 일본과 거리를 따지면 통영보다 수영이 군사적으로 훨씬 중요했다.

군사적 중요성이 대단했으므로 조선 시대 수영은 어마어마했다. 지금의 지자체 수준이 아니었다. ‘내영지(萊營紙)’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내영은 동래 수영을 줄인 말로 수군이 주둔하던 수영성에서 1850년 발행한 수영 백서다.

여기에 수영이 맡은 지역이 상세하게 나온다. 다음과 같다. 부산진, 다대포, 기장 두모포, 서생포, 울산 개운포, 염포, 경주 감포, 장기 포이포, 흥해, 영덕, 영해.

맡은 지역 면면을 보면 수영은 단순한 군부대가 아니었다. 이른바 본영(本營)이었다. 낙동강에서 경북까지 아우르는 군사 요충지면서 이 일대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관할 지역이 울산 앞바다까지로 좁혀들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단했다. 조선 시대 수영은 지금 수준의 자치구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초광역 군사 대도시였다.

조선 시대 수영이 있던 곳은 어디 어디일까. 이북 지역을 제외하면 부산을 포함한 경상도와 전라도는 각 두 군데, 나머지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는 하나씩 있었으므로 모두 일곱 군데였다.

수영과 통영, 여수, 해남, 보령, 강화, 원주가 거기였다. 강원도 원주는 육군과 수군, 즉 병영과 수영을 겸했다. 이들 도시 지명은 제각각 분화했지만 원뿌리는 수영이었다. 원뿌리를 지금도 날것 그대로 간직하는 데가 우리 부산 수영이다.

수영 토박이는 대부분 선친처럼 자부심이 대단하다. 뿌리 의식 역시 남다르다. 다른 지역 수영 사람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지역을 지키고 조선을 지킨 도시라는 자부심은 여기와 거기가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이러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이러한 뿌리 의식을 바탕으로 전국의 수영이 ‘자매결연’할 것을 제안한다.

전국 단위가 어렵다면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의 하삼도라도 마음을 한데 모았으면 한다. 일본의 작태가 곧잘 사회적 문제가 되고 민족적 공분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하삼도 수영이 마음을 한데 모아서 반일을 넘어 극일의 길로 나아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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