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황제 희로애락 숨은 고대 로마 역사와 정신의 고향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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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인문학 기행-이탈리아] 로마 팔라티노 언덕



팔라티노 언덕 전경. 팔라티노 언덕 전경.

영어로 궁전을 ‘팰리스’라고 한다. 이 단어의 어원은 팔라티노 언덕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에서 나왔다. 2세기 로마 역사학자 카시우스 디오가 쓴 『로마사』에 그 내용이 나온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물리치고 내전을 승리로 장식하자 원로원은 그의 집 앞에 월계수 나무를 심고 정문 위에는 참나무 관을 걸어둘 수 있도록 의결했다. 카이사르가 팔라티노 언덕에서 산 적이 있었고, 그 집터가 과거 로물루스의 집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집을 팔라티움이라고 불렀다. 이후 로마 황제가 어디서 살더라도 그의 집을 팔라티움이라고 부르게 됐다.’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하면서 팔라티움과 팔라티노라는 단어는 유럽과 동방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갔다. 고대 유럽인에게 영웅 이상의 존재였던 카이사르의 이야기가 얽혀 있고 역대 황제가 살았던 곳과 연관된 단어인 만큼 유럽인은 이 단어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생각했다. 팔라티움과 팔라티노는 스페인에서는 팔라시오, 독일에서는 팔라스트, 프랑스에서는 팔레, 이탈리아에서는 팔라조로 변해 왕이나 황제가 사는 궁전을 의미하게 됐다.

팔라티노 언덕에는 한 차례만 궁전이 지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모든 황제가 다 궁전을 건설했던 것도 아니었다. 이곳에 황궁을 만든 황제는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네로, 도미티아누스 등 네 명뿐이었다. 새 궁전을 지은 네 황제에게는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네 황제의 궁전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팔라티노 언덕 입구. 팔라티노 언덕 입구.


아우구스투스, 내전 승리 후 언덕에 이사

로마 역사에 팔라티노 황궁 시대 열어

신화 앞세워 황가 홍보 수단으로 활용


■도무스 아우구스티


팔라티노 언덕에 황궁 건설의 역사를 연 사람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였다. 그에게 팔라티노 언덕은 고향 같은 곳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볼스키족 도시인 벨레트리이의 부자 기사계급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누나의 딸이었다. 두 사람은 팔라티노 언덕에 집을 가지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집에서 태어났고 젖먹이 시절을 보냈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된 뒤 처음에는 포로 로마노에 있던 저택에서 살았다. 시인이었던 리키니우스 칼부스가 소유하고 있던 집이었다고 하니 화려하거나 큰 집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악티움 해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눌러 로마의 1인자가 된 뒤 팔라티노 언덕으로 집을 옮겼다. 공화정 시대 호민관이었던 ‘평민의 영웅’ 호르텐시우스의 집과 BC 102년 집정관이었던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의 집을 사들여 수리한 저택이었다. 이것이 팔라티노 언덕 최초의 황궁인 도무스 아우구스티였다. 도무스는 ‘대저택’이라는 뜻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이 부분을 새 궁전 부지로 고른 것은 단순히 전망이 좋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를 로마에 번영과 평화를 가져다주고, 새로운 지도자 계보를 시작한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혈통만이 로마에 영원한 평화와 부를 지속시킬 수 있다고 로마인을 세뇌시키려 애썼다. 이를 위해 다양한 선전 또는 자기홍보 도구를 사용했다. 여기에는 건축물도 있었고 문학도 있었다. 팔라티노의 궁전도 그런 도구 중 하나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조각상 아우구스투스 황제 조각상

아우구스투스가 도무스 아우구스티를 건설한 곳은 신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언덕 아래로는 늑대 루파가 바구니에 담긴 ‘로마 건국의 아버지’ 로물루스 형제를 건져 올려 젖을 물린 테베레 강이 보였다. 궁전 인근에는 위대한 ‘어머니 여신’인 마그나 마테르의 신상을 모신 신전과 조점관 아우구르가 새 점을 치던 장소인 아우구라토리움도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늘 가족의 내력을 고민했다. 어머니는 카이사르의 조카였으니 핏줄로 보아 부끄러울 게 없었다. 그가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선정된 것은 어머니의 혈통 덕분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달랐다. 시골마을에서 올라온 호모 노부스(신참)여서 로마에서 명함을 내밀 처지조차 되지 못했다. 그는 이 점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로마에서 가장 유서 깊은 신화가 서려 있고 로마인이 매우 숭앙하는 두 신전이 있는 곳에 살게 되면 신화, 신전의 권위를 앞세워 부족한 가문의 내력을 덮을 수 있겠지. 모두가 우러러보는 황제의 권위를 지킬 수 있을 거야.’



도무스 아우구스티 유적. 도무스 아우구스티 유적.

도무스 아우구스티는 처음에는 소박했던 아우구스투스의 성격에 걸맞게 사람의 눈길을 끌만큼 화려하거나 웅장하지 않았다. 몇몇 역사학자는 도무스 아우구스티를 ‘작은 사저’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무스 아우구스티에는 알바롱가에서 가져온 돌기둥으로 만든 짧은 회랑이 있었지만, 대리석이나 눈에 띄게 아름다운 돌을 바닥에 깐 방은 없었다. 가구도 소박해서 일개 시민의 집보다도 못했다. 이런 기록도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팔라티노 언덕의 집으로 이사를 갈 때 만들었던 침대를 버리지 않고 40년 동안 사용했다.’



황제 탓에 부모 이혼한 티베리우스

아버지 슬픔 고스란히 안은 채 즉위

선황 궁전 버리고 새로운 저택 마련


■도무스 티베리아나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는 팔라티노 언덕 북서쪽에 궁전을 새로 지었다. 도무스 아우구스티와 등을 진 채 카피톨리노 언덕과 포로 로마노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방향이었다. 새 궁전은 그의 이름을 따서 도무스 티베리아나라고 불렀다.

티베리우스는 긴축재정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 사람이어서 새 건축물을 거의 짓지 않았다. 그런데 왜 양아버지인 아우구스투스가 지은 집을 놔두고 궁전을 새로 건설한 것일까? 그의 슬픈 인생을 살펴보면 그 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가 되기 전 옥타비아누스 시절일 때 숙적이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군사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그는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기로 했다. 첫 부인인 풀크라와 이혼하고 폼페이우스 부인의 사촌여동생인 스크리보니아와 정략결혼을 했다.


티베리우스 조각상. 티베리우스 조각상.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아우구스투스가 정적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부인인 리비아를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리비아는 다섯 살 된 큰아들 티베리우스를 키우면서 둘째 아들 드루수스를 임신한 상태였다.

사랑에 눈이 먼 아우구스투스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네로를 불러 이혼을 강요했다. 고대 로마에서 이혼은 흔한 일이었다. 그래도 유부녀를 협박해 강제로 이혼시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고 비난을 받을 ‘사건’이었다. 네로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살아 있는 권력’의 요구를 거부한다면 그는 물론 어린 아들과 친척, 친구들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는 터였다.

티베리우스는 부모의 강제 이혼 이후 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아버지 집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6년 뒤 한 많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포로 로마노의 로스트라에서 눈물을 삼키며 추도사를 읽었다. 이후 동생을 데리고 팔라티노 언덕으로 올라가 어머니 리비아와 함께 도무스 아우구스티에서 살았다.

아버지 네로가 세상을 떠났을 때 드루수스는 겨우 여섯 살이었지만 티베리우스는 열두 살이었다. 아버지의 모습을 평생 가슴에 담을 만한 나이였다. 네로는 어린 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기록이 없으니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아들의 가슴에 깊은 한을 새기기에 충분한 내용을 거듭 말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티베리우스도 권력에 굴복해 아내를 빼앗긴 아버지를 이해하고 딱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자라 성년식을 치를 때 검투사 경기를 두 차례 개최한 사실은 이런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한번은 아버지 네로를 위해 포로 로마노에서, 다른 한번은 할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원형경기장에서 거행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버지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다 붙임성이 좋았던 드루수스와는 매우 친하게 지냈다. 반면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한 듯 늘 어두웠던 티베리우스와는 서먹했다. 죽기 직전에 할 수 없이 후계자로 지명하기는 했지만 그는 평생 티베리우스를 믿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우구스투스는 사람들 앞에서도 거침없이 티베리우스의 잔혹한 성품을 비난했다. (중략) 그가 들어오면 입을 다물었다는 풍설이 있을 정도였다.(수에토니우스 『열두 명의 카이사르』)’



포로 로마노에서 바라본 도무스 티베리아나 흔적. 포로 로마노에서 바라본 도무스 티베리아나 흔적.


‘티베리우스는 어머니와 평생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기록한 역사가도 있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로마를 떠나 카프리에 틀어박혀 인생의 마지막을 보낸 것은 아버지를 버린 어머니에 대한 복잡한 심경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티베리우스는 아버지를 외로움에 떨다 눈을 감게 만든 아우구스투스가 지냈던 도무스 아우구스티에서는 살고 싶지 않아서 새 궁전을 만들었을 거라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어머니 살해하고 스승 자살시킨 원흉

네로 황제 인간적 불행 담은 어둠의 궁전

“로마 대화재 불행에 열광” 오해받기도


■도무스 트란시토리아


현대인이 팔라티노 언덕의 궁전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리는 황제는 네로다. 60년에 발생한 로마 대화재 때 이곳의 궁전에서 리라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사실인 부분도 있지만 오해도 적지 않다.

티베리우스도 그랬지만 네로도 인간적으로 불행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들을 황제로 만들겠다는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욕심 때문에 어릴 때부터 큰 압박을 받았다. 아그리피나는 아들을 황제로 만들려고 남편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독살하기까지 했다. 네로는 그때 열여섯 살이었으니 어머니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네로는 황제 즉위 이후에도 어머니의 등쌀에 시달렸다. 견디다 못해 스승 세네카와 상의한 끝에 어머니를 황궁에서 내쫓아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어머니를 암살했다. 이후에는 황제 암살 공모 혐의를 뒤집어씌워 스승도 자살하게 만들었다.


도무스 트란시토리아 유적. 도무스 트란시토리아 유적.


두 사람의 죽음 이후 네로의 정신세계는 황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선황 클라우디우스가 암살당한 궁전에서 사는 것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암살한 클라우디우스의 유령이 밤마다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궁전 곳곳에는 어머니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어머니의 유령이 나왔을 수도 있다.

네로는 새 궁전을 짓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도무스 티베리아나를 기반으로 해서 새로 만든 도무스 트란시토리아였다. 정확한 완공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60년으로 추정된다. 어머니를 궁에서 쫓아낸 게 55년이었고 살해한 게 59년이었으니, 그 다음해에 도무스 트란시토리아에 들어가 살게 된 셈이다.

1~2세기 로마 역사학자 타키투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네로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친구이자 자문이었던 가이우스 킬니우스 마이케나스가 에스퀼리노 언덕에 만든 마이케나스 정원과 새로 만든 궁전을 연결시켰다. 마이케나스 궁전과 정원 이야기는 60년에 발생한 로마 대화재에 등장한다. 1~2세기 로마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는 『열두 명의 카이사르』에 이렇게 적었다.

‘네로는 (마이케나스 정원의)마이케나스 탑에서 로마가 불타는 것을 보면서 열광했다.’


허버트 로버트의 ‘로마 대화재’ /위키피디아. 허버트 로버트의 ‘로마 대화재’ /위키피디아.


이 글 한 줄 때문에 여러 영화와 소설에 네로가 미친 황제로 묘사되곤 했다. 하지만 현대 역사학자들은 네로가 화재로 피해를 입은 로마 시민을 위해 펼친 대책을 보면 수에토니우스의 글은 지나친 폄훼라고 지적한다.

대화재 때문에 도무스 트란시토리아도 피해를 입었다. 네로는 이번에는 도무스 아우레아(황금궁전)를 짓기 시작했다. 지금 콜로세움이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황금궁전이 완공되기 전에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는 로마에서 달아났고,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제국 사상 첫 한집안 세 번째 황제

번영가도 달리는 로마 상징 궁전 건설

현재 팔라티노 언덕 잔해 대부분 차지


■도무스 도미티아나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그리고 네로에 이르기까지 여러 신축 궁전을 살펴봤다. 이제 팔라티노 언덕에 건설된 마지막 궁전 이야기를 할 때다. 오현제 시대가 열리기 전 베스파시아누스 황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도미티아누스가 만든 제정 시대의 마지막 신축 궁전인 도무스 도미티아나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둘째 아들이었던 도미티아누스는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네로와 마찬가지로 어릴 때 그다지 유복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큰아들 티투스만 데리고 늘 전쟁터를 돌아다닌 탓에 그는 로마에서 어머니, 누나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 누나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작은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사비누스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그의 나이는 10대 초반이었다.


도무스 도미티아나 유적. 도무스 도미티아나 유적.


도미티아누스는 늘 형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형은 아버지를 따라 군에 들어가 동방에서 유대 반란을 진압하면서 큰 성과를 올렸지만 그는 로마에서 공부만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황제로 즉위한 뒤 형은 공동 통치자가 돼 경력을 쌓을 때 그는 형식적 직위에 만족해야 했다. 머리가 좋았던 그로서는 불만이 적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형 티투스가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형은 폼페이 화산 대폭발 등을 수습하느라 고생만 하다 2년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도미티아누스는 뜻하지 않게 황제가 됐다.

도미티아누스의 아버지와 형은 평생을 군에서만 보냈다. 로마 출신이 아니라 로마 북쪽에 있는 시골 마을 팔라크리나 출신이어서 호모 노부스(신참)라는 열등감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는 달랐다.

도미티아누스가 즉위할 무렵 베스파시아누스 가문은 로마 최고의 명문 집안이 돼 있었다. 아버지와 형이 대를 이어 황제였던 경우는 로마 제정에서 그가 처음이었다. 아버지와 형은 군인으로 늘 고생만 하며 살았지만, 그는 황제의 아들이자 동생으로서 우아하고 화려하게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도무스 세베리아나 유적. 도무스 세베리아나 유적.


‘나에게는 아버지와 형이 가진 열등감은 없어. 세상을 보는 눈이 두 사람과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야.’

도미티아누스가 네로의 도무스 트란시토리아를 넘어서는 엄청난 궁전을 만들 계획을 세운 것은 이런 점에서 보면 지나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로마는 내전 후유증에서 벗어나 번영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로마인 중에서 그를 두고 오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게 81~92년 11년 동안의 공사를 거쳐 완성한 도무스 도미티아나였다. 2세기 황제였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이 궁전 옆에 도무스 세베리아나를 덧붙였다.

지금 팔라티노 언덕에 올라가면 언덕 위에 많은 궁전 잔해가 보인다. 대부분 도무스 도미티아나와 나중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증축한 도무스 세베리아나다.


3세기 이후 황제, 로마 방문조차 어려워

콘스탄티누스 천도 이후 언덕 가치 몰락

9세기 잦은 지진으로 궁전 무너져 폐허


■몰락한 언덕


도무스 도미티아나를 끝으로 팔라티노 언덕에 새로운 궁전을 건설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도미티아누스 이후 이어진 오현제 시대에 등장한 다섯 황제는 성격이나 시대 상황 때문에 궁전을 지을 생각은 물론 여력도 없었다.

3세기 중엽 로마에 군인 황제 시대가 도래했을 때 군인 출신 황제들은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외적을 맞아 싸우느라 팔라티노 언덕의 궁전에 들어가 잠시 침대에 등을 댈 여유는커녕 로마로 돌아올 시간조차 없었다.



도무스 도미티아나 유적. 도무스 도미티아나 유적.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이후 팔라티노 언덕에서는 아예 황제가 살지 않게 됐다. 4~5세기 서로마제국 황제들은 이탈리아 동부 해안 도시인 라벤나에 숨어 살면서 로마에 잠시 다녀갈 때에만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팔라티노 언덕 중심부는 여러 차례 지진으로 무너져 9세기 중엽 교황 레오 4세 시대에는 접근하기조차 어려울 정도가 됐다. 궁전 등의 건물이 폐허가 된 것은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팔라티노 언덕은 아무도 찾지 않는 유령의 땅에 불과했다.

망각의 깊은 땅 속에 묻혀 있던 팔라티노 언덕은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도무스 도미티아나는 1728년, 1860년 발굴조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2006년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출생지로 보이는 집을 발굴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와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아직도 발굴해야 할 곳은 많고 갈 길은 멀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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