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노랫말의 위안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우리 대중가요의 출발점은 ‘유행 창가’다. 개화기에 나라 바깥에서 찬송가나 창가 같은 서양 노래와 일본 노래가 흘러들었는데, 여기 새 가사나 번안한 노랫말을 붙인 것이다. 음반으로 남은 가장 오래된 유행 창가는 ‘청년경계가’(1925년)다. 이 곡과 함께 같은 해 선보인 대중가요 모두가 일본 유행가의 번안작이었다. 1926년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사람이 처음으로 창작한 대중가요로는 ‘낙화유수’(1927년)를 꼽을 수 있다. 대중가요는 창작의 영역으로 넘어갔으나 그 형식은 일본 엔카였다. 지금 ‘트로트’라고 불리는 바로 그것의 뿌리다.

대중가요의 인기는 선율에 많이 의지하고 있지만 노랫말이 갖는 힘을 빼놓을 수 없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와 정서를 품는 까닭에 몇 소절만으로도 공감을 빚고 전파를 탄다. ‘이 풍진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지금은 ‘희망가’로 잘 알려진 ‘청년경계가’는 식민지 조선을 둘러싼 허무주의적 분위기로 걸쭉하다. ‘강남 달이 밝아서 님의 놀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어졌네….’ 현실도피로 향한 당대 민중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낙화유수’도 다르지 않다.

노랫말은 시대의 풍경화다. 일제강점기엔 식민 지배의 울분, 1950년 전후엔 전쟁과 분단의 아픔, 1960~70년대에는 경제성장의 감격과 소외, 그리고 1980년대 들어 작고 소외된 것에 대한 애정과 성찰이 노랫말을 탔다. 1990년대부터 시대 변화와 함께 공감과 소통의 다채로운 노랫말이 펼쳐지고 있다. ‘한류’를 이끄는 케이 팝의 성장에는 이런 울퉁불퉁한 역사가 자양분이 됐을 터이다. 유행가는 시대와 함께 공간을 가로지른다. 음악도시 부산만 따져도 지역 곳곳의 지명과 장소를 노래한 대중가요들이 많다. 영도다리를 노래한 그 숱한 유행가처럼, 민중의 아픔과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부산박물관이 ‘노랫말, 선율에 삶을 싣다’ 특별전(내달 10일까지)을 열고 있다. 100여 년간 우리 대중의 삶과 함께한 유행가 노랫말의 발자취를 좇다 보면, 노랫말의 숨은 가치가 새삼 빛을 발한다. 연말연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노랫말로 위안을 받는 시간은 어떤가. ‘나만의 노랫말 한 소절’을 발견하는 기쁨이 기다린다. 가령, ‘아무도 뵈지 않는 암흑 속에서/ 조그만 읊조림은 커다란 빛’(김광석 ‘나의 노래’) 같은.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