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칼럼] 용서와 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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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집단 수용소에 갇혀 있던 시몬 비젠탈은 어느 날 갑자기 온몸에 붕대를 한 채 죽어 가는 SS(나치 친위대) 대원 카를의 병상 앞에 서게 된다. 그 SS 대원은 난생처음 보는 유대인에게 과거 자신이 저지른 잔인무도한 유대인 학살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죄의식으로 고통스러운 나머지 낯선 유대인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음으로써 마음 편히 죽을 수 있도록 용서를 구한 것이다. ‘그를 동정할 것인가 심판할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진실을 털어놓을 것인가’, 양자택일의 순간에 비젠탈은 결국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떠나고 만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비젠탈의 마음 한구석에는 같은 질문이 맴돌았다. ‘과연 내가 옳은 일을 한 것인가. 내가 어떻게 해야 했던 건가?’

뜬금없는 이명박·박근혜 ‘사면론’
통합 명분 불구 정치 셈법 의구심

사면은 헌법이 정한 대통령 권한
자의적 해석·정치 도구화는 안 돼

용서와 관용도 피해자와 국민 몫
대통령은 국민 뜻 신중히 받들길


나치 전범 추적에 평생을 바친 비젠탈이 실제 경험을 풀어쓴 책 <해바라기> 내용이다. 정의와 동정, 그리고 인간의 책임에 대해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 모임에서 이 책을 읽은 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물었다. “나라도 비젠탈처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대답이 많았다. 그다음 질문은 “비젠탈은 카를을 ‘용서’한 것일까”였다. 누구는 비젠탈이 용서한다는 말만 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 용서한 것과 다름없다고 해석했고, 나를 포함한 몇몇은 카를을 동정했을지언정 용서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다른 한편으론, 카를을 ‘용서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용서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적어도 용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오직 희생자이거나 그의 유가족일 테니까 말이다.

비젠탈의 용서 문제를 떠올린 건,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의 뜬금없는 ‘사면론’ 때문이다. 혹시라도 지지율의 추세 반전을 노린,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정치적 승부수’는 아닌가 싶어 화가 났다. 더 솔직히는 1995년 12월 구속기소돼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반란(내란)수괴·내란·내란목적살인 등의 죄목으로 무기징역이 확정됐으나 그해 12월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전두환 씨가 생각났다. 전 씨 세력은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왜곡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건의한 ‘통 큰 사면’ 명분도 국민 대화합과 지역갈등 해소 차원이었지만, 그 결과가 어땠는가 말이다.

사면권은 헌법 제79조에 보장된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다. 하지만 사법부의 재판 결과를 변경하는 것으로, 법치주의에 대한 중대한 제한이므로 지극히 신중해야 한다. 우리 헌정사를 볼 때 1948년 9월 건국 대사면이 실시된 이래 정치적인 고려에 따라 단행된 사면이 100여 회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사면이 행사될 때마다 적정성 논의와 함께 사면법 개정의 필요성이 주장됐다. 이번에 사면론을 제기한 이 대표도 17대 국회 때인 2005년 ‘사면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한 적이 있다. 주호영 의원 등 11명이 이름을 올렸다. 대안 법안이 반영되면서 폐기됐지만, 개정안에는 “헌정질서파괴범죄를 저지른 때는 특별사면을 할 수 없다”는 규정을 포함했다. 이 규정이 통과됐다면 ‘국정농단’ 사건으로 재판 중인 박 전 대통령 사면은 논의조차 힘들었을 테니 아이러니하다.

물론 둘로 쪼개진 국론을 수습할 타개책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사면권을 남발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두 전직 대통령은 사죄는커녕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이 전 대통령은 대법원 판결이 나자 “정치 보복”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 역시 다르지 않다. 이런 사람들에게 사면 운운하는 것은 국민 정서와도 맞지 않는다. 용서와 관용은 오롯이 피해자와 국민의 몫이어야 한다. 대통령은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들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사면권이 자의적으로 행사되거나 정치적 도구로 악용되어선 안 된다. 지금은 누가 누구를 용서하기보다는 두 전직 대통령 스스로 좀 더 성찰할 필요가 있겠다.

<해바라기>의 저자 비젠탈은 나치와 학살자들에 의해 무려 89명이나 되는 일가친척을 잃고 아내와 단둘이서만 살아남았다. 전쟁이 끝난 후엔 미국전쟁범죄조사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수용소 출신의 생존자들과 함께 유대역사기록센터를 설립해 운영하면서 무려 1100명 이상의 나치 범죄자들이 심판을 받도록 했다. 비젠탈은 결코 그 일을 잊어버리지 않았으며, 그 덕분에 우리도 비극을 기억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 비극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한, 훗날 다른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해 낼 수도 있다. 이미 사면이 단행된 전 씨는 말할 것도 없고, 이명박·박근혜 세 전직 대통령이 국민 앞에 진심으로 참회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사면에 대한 논의는 그 뒤에 해도 늦지 않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국민통합이고, 미래를 위한 일이다.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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