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라-리] 아이들 웃음이 사라진 그곳엔…광안리 삼익비치 폐수영장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 장은미 기자 mi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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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미스터리 수사대 '날라-Lee'.

<부산일보> 독자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날라'주는 '이' 기자입니다.

기자가 무엇입니까. 권력 감시같은 묵직한 '스트레이트 펀치'만 날려야 합니까. 갈고 닦은 취재 기술로 일상 속 미스터리, 궁금증을 풀어주는 '잽'도 던져야 합니다.

'동치미 막국수'처럼 속 시원하게 뚫어드리겠습니다. 끝까지 파고들 테니 무엇이든 댓글로 제보해주십시오.


'타닥타닥' 뭔지 모를 화학반응이 일어날 것 같은, 그래서 찐득찐득한 괴생명체가 꿈틀댈 것만 같다.

지하실 입구까지 닿는 데 족히 3분이다. 한 발짝 갈수록 누군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방금 구매한 초강력 헤드랜턴 불빛으로 내려다본 지하는 암흑. 계단에는 담배꽁초, 컵라면 용기, 비닐봉지 등 사람의 흑적이 있다.

찜찜한 기분에 벽에 손도 대지 않고 10여 칸을 내려갔다. '우회전'을 앞두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누군가 있다면 인터뷰부터 해야 한다'는 미친 의무감이 샘솟는다.

식은땀을 뒤로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정확히는 신발장 정도까지만 갔다. 불빛이 비친 방에는 대형 배관과 캐비닛이 널브러져 있다. 바닥에는 물이 고였다. 꽤 넓은지 방 끝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순간 '턱턱'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그대로 뛰쳐나왔다. 거리에 사람이 지나다니는 것을 보자 가슴까지 차올랐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다음 날 오전 10시. 아파트단지 초입 '폐수영장'을 다시 찾았다. 햇빛이 쨍쨍했지만 전날 밤 이후 지하실과는 '손절'했다. 그곳에선 여전히 오싹한 기운이 풍겼다.

재건축을 앞둔 낙후된 아파트 단지. 그 속에서도 폐수영장의 '빈티지' 존재감은 남달랐다. 돌에 정통으로 맞은 듯 깨진 창문, 찢긴 채 나풀대는 현수막…. 오래 전 폐쇄된 듯, 건물 출입문에는 '특별순찰구역 공폐가' 딱지가 붙었다.

옛날 감성 그대로 담장에는 수영, 매표소, 해수탕 등의 글자가 고딕체로 크게 적혔다. 희미하게 보이는 '051-000-0000' '010-0000-0000' 번호로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없는 번호'.


"뭐 예전에 야외수영장이라고 들었는데, 가보진 못했지. 지금 저 모양인데 왜 가만히 놔두는지 몰라. 흉물스럽잖아요. 재건축 때문에 소송한다는 얘기도 있고…."

주민들은 예상 외로 이곳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사실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인근 부동산도 '사유지라 구체적으로 얘기해주기 어렵다'고만 했다.

구청, 주민센터 등을 수소문해 조금씩 의문의 실타래를 풀었다. 과거 10년간 이곳을 운영했던 분의 아들인 김세윤 씨를 만날 수 있었다.

"30대 중반부터 50대까지 부산 시민들은 이곳을 다 기억할 겁니다. 그때는 모든 학교가 여기로 체험학습을 올 정도로 문전성시였으니까요."


폐수영장의 정체는 부산 수영구 남천동 '삼익스포츠센터'. 1980년에 등록된 전국 최초 유수풀장(물을 한 방향으로 계속 흐르도록 해 튜브 등을 타고 노는 수영장)이다. 동시에 부산의 첫 워터파크이자, 광안리해수욕장 물을 끌어와 쓰는 해수풀장이었다. 당시엔 혁신적이고 호화스러운 시설 탓에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말까지 돌았다고.

오픈 당시 실내·외 수영장뿐 아니라 목욕탕, 헬스클럽, 매점도 문을 열었다. 헬스클럽 등이 중간에 사라지고 키즈클럽, 스쿼시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삼익스포츠센터는 큰 인기를 끌다 2005년 1월 3일 공식 폐업했다. 아파트 재건축이 확정된 이후 더는 운영할 만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주변에 더 좋은 물놀이 시설도 생겨나 경쟁력을 잃었다고 한다. 그래도 나름 '20년 추억'이 스며 있다.


1980년대 운영 당시 수영장 모습. 김세윤 씨 제공 1980년대 운영 당시 수영장 모습. 김세윤 씨 제공

부서진 담벼락 사이로 물미끄럼틀이 한동안 눈에 들어왔다.

사방에 쌓인 쓰레기들이 사라지고, 수영복 차림의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빨간 토큰 하나를 내밀고 미끄럼틀 출발점에 차례로 앉는 아이들. 상기된 표정으로 물미끄럼틀을 질주하며 기분 좋은 비명을 질러댄다.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은 채 타는 중수, 팔을 벌린 채 서서 내려가는 고수도 있다. 바로 옆 토큰 가게에서는 실랑이가 벌어진다. 100원짜리 토큰을 10개 산 친구들이 서비스 1개만 더 달라고 난리다.

돌고 도는 유수풀장에서는 다들 정신을 못 차린다. 튜브가 옆 사람과 벽에 이리저리 부딪치다 결국 전복된다. 부모들은 애들 튜브를 잡느라 팔뚝 근육이 울끈불끈 솟아 있다. 인근 대학교에 다니는 대학생 안전요원의 호루라기도 쉼 없이 삑삑댄다. 구릿빛 몸에 선글라스를 끼고 한껏 경계 태세다. 안전요원의 눈치를 살피며 깊은 물가에서 얼쩡대는 앳된 얼굴의 아이들.

"들어갑시다."

PD의 한마디에 순간 현실로 돌아온다. 깔깔대던 아이들 웃음은 사라지고 길가 차량 소음만 귓전을 때린다.



지금의 수영장 모습은….

마치 좀비가 숨어 있을 것만 같은 '오염된 폐허 도시' 같다.

단순히 도시 미관 문제가 아니었다. 주민 안전을 위협하는 우범지대다. 아무나 담벼락을 뛰어넘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폐수영장 관리가 허술했다. 촬영 도중 성인 2명이 버젓이 지하실에 들어가는 모습이 목격됐다. 취재팀은 위험한 실태를 알리고 하루빨리 개선책을 찾아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내부 모습을 공개하기로 했다.


내부는 예상한 대로 '위험한 놀이터'였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대형 나무들이 쓰러져 있고, 풀장에는 빗물로 보이는 물이 차 있다. 뾰족하게 날 선 창문은 부서진 채 위태롭게 달려 있다. 굳게 닫힌 스포츠센터 건물도 물미끄럼틀 뒤로 들어갈 수 있다. 한 방범순찰자는 노숙인이 이곳에 기거한다는 목격담을 전했다.

풀장 옆에는 깊이가 족히 5m는 돼 보이는 우물 같은 구덩이가 시커먼 입을 드러내고 있었다. 뚜껑 없이 활짝 열린 상태다. 어두운 밤에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혼자선 나올 수 없을 정도다.

눈에 보이는 사건사고가 없어서인지 구청 등은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는 상황이다. 수영구 건축과 관계자는 "부지 소유자나 재건축 조합에 정비를 요청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재건축을 앞둔 부산 삼익비치아파트 조감도 재건축을 앞둔 부산 삼익비치아파트 조감도

"조금 있으면 없어질 건데, 일개 수영장 부지가 무슨 추억이고 그런 게 있겠습니까."

수영장 부지를 소유한 기업 관계자의 말이다. 떠도는 얘기로는 재건축 효과에 폐수영장 부지 가격이 상상을 뛰어넘는다고 한다. 주민들 역시 가만히 있어도 돈이 벌리는데 뭐하러 정비를 하겠냐는 반응이다. 삼익비치아파트는 2023년 착공이 예정돼 있다. 그때까지 혹은 재건축이 늦어진다면 그 뒤에도 이모습 그대로 존치될 우려가 크다.

앙상한 물미끄럼틀을 다시 한동안 쳐다봤다. 아이들의 기분 좋은 비명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담장 밖 차 소리에 금세 묻혀버린다. 시간이 흐르고, 이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는... 왠지 모를 서글픔이 밀려온다.

#재건축 #돈 #어른들의 욕심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촬영·편집=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그래픽=장은미 기자 mimi@busan.com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 장은미 기자 mi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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