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익의 참살이 인문학] 석차를 알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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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 교수

학기 말이면 늘 신경 쓰이는 게 성적에 대한 학생들의 이의 제기다. 많은 학생의 점수를 다루다 보면 채점이 누락될 수도 있고 계산이 잘못될 수도 있으니, 예상했던 성적과 다를 때 확인을 요청하는 건 학생의 당연한 권리다. 이번 학기에도 학생의 요청으로 나의 실수를 발견해 사과와 함께 수정한 사례가 두 건이나 있었다. 요즘에는 모든 성적이 온라인에서 자동 처리되므로 오류가 많이 줄었지만, 채점이 누락되는 경우 알려 주는 시스템은 아직 없는 것 같다.

문제는 적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계속 승복하지 않는 학생이 있다는 것이다. 항목별 점수를 공개하고 어떤 점이 부족했는지 보여 줘도 여러 이유를 대며 수정을 요구하는 학생도 있다. 실제로는 출석을 했지만 시스템이 결석으로 처리했다거나 열심히 했는데 평가가 너무 박하다는 등 교수가 확인하거나 수정하기 어려운 주문도 있다. 그중에서도 전체 수강생 중에서 몇 등인지 알려 달라는 요청이 가장 당혹스럽다.


점수·석차, 인간의 궁극적 가치 아냐

협동의 창조적 학습으로 활력 찾아야

체화된 공감·소통이 자아 성장 역량


수업의 최종 결과가 점수와 석차로 표시될 수밖에 없는 상대평가 시스템에서 그것을 공개해 달라는 요구는 학생의 정당한 권리일 수 있다. 하지만 삶의 의미와 가치를 다루는 인문학 수업의 결과를 점수와 석차로 표시해 달라는 요구는 무척 생뚱맞다. 상대평가라는 경쟁 시스템이 만들어 낸 ‘웃픈’ 현실이다.

10여 년 전 지금 일하는 곳이 아닌 다른 의과대학에 근무하던 시절의 일이다. 그 대학에서는 매년 학생 스스로 주제를 정해 연구한 다음 그 결과를 발표하고 공유하는 행사를 연다. 그중 한 팀의 연구 대상은 자기 자신들이었다. 당시 나는 동료 학생들을 대상으로 심리검사를 한 다음 그 결과를 발표하는 모임의 좌장이었다. 학습의 양이 너무 많고 그 결과를 상대적 척도로 평가받아야만 하는 학생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당연히 성적이다. 그런데 성적이라는 스트레스가 학생들 내면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결과는 다소 충격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장 큰 심리적 문제가 ‘자존감 상실’이라고 진단했다. 최상위권에 속하는 성적으로 당당히 의과대학에 입학한 그들이 실은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들이 심리검사를 통해 찾아낸 두 번째 문제는 흉금을 털어놓을 친구가 없다는 거였다. 주변의 친구가 모두 경쟁 상대이다 보니 서로를 경계할 수밖에 없어서 전면적 인간관계를 맺기가 어려워진 때문일 것이다. 경쟁은 고립을 낳고 고립된 자아가 자존감을 높일 방법은 그 경쟁에서 이기는 길뿐인데, 친구여야 할 주변의 동료가 모두 쟁쟁한 경쟁 상대이다 보니 경쟁에서 이기지도 그렇다고 진정성 있는 친구 관계를 맺지도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나는 그 대학을 떠났지만, 그 대학의 교육 담당자들은 학생들이 제기한 문제에서 교육 개선의 중대한 실마리를 찾아냈다. 10년 이상이 걸렸고 많은 논쟁과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경쟁적 상대평가 제도를 없애고 단계별로 진급과 유급을 결정하는 절대평가 시스템을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이 제도는 이미 다른 대학에서 시작되어 충분히 검증된 바 있으므로, 그 자료를 참고로 철저히 준비한다면 경쟁이 아닌 협동을 통한 창조적 학습으로 자존감도 높이고 진실한 친구 관계도 복원할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점수와 석차는 그 주인을 채찍질할 계기일 수는 있어도 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 목적이나 가치일 수는 없다.

협동을 통한 창조적 학습의 경험은 경쟁 위주의 사회생활에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아픈 사람을 돌보아야 할 의료인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품성이 공감과 소통이다. 말로만 외치거나 하나의 기술로 환원된 능력이 아니라 협동을 통한 창조적 학습의 경험 속에 체화된 공감과 소통이어야 타인을 돌보고 스스로를 배려하여 자존감 넘치는 자아로 성장하는 역량일 것이다. 이런 역량을 점수와 석차로 평가할 수는 없다.

역시 그 대학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봉사와 현장 실습을 겸한 프로그램을 위해 중증 장애인을 돌보는 시설을 방문한 적이 있다. 대부분 거동이 불가능한 아이들이었지만 스스로 걸을 수 있는 아이 하나가 방구석에 앉아 있었는데, 우리 일행이 들어서자 곧바로 생면부지의 내게로 달려와 나를 아주 세게 끌어안는 것이었다. 이 상황은 시설을 관리하는 분이 우리 둘을 억지로 떼어 놓고서야 끝났다.

이해되지도 설명할 수도 없었던 이 경험은 10년 이상 지난 지금까지도 내 가슴 한 구석에서 깨어나 “너는 지금 바르게 잘 살고 있느냐”라고 묻는다. 자기의 점수가 전체에서 몇 등인지의 물음을 이렇게 묵직한 실존의 질문으로 바꾸는 것이 교육의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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