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없는 삶을 위해… 작지만 큰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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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울경 ‘제로 웨이스트 숍’을 찾아서

부산 북구 덕천동의 ‘천연제작소’. 샴푸와 보디샴푸, 구연산 등을 개인 용기에 필요한 양만큼 담아 살 수 있고, 다양한 시판 친환경 제품과 자체제작한 비누와 면 제품도 만날 수 있다.

칫솔이 썩는 데 걸리는 시간은 최소 100년 이상. 칫솔 손잡이가 동물뼈에서 플라스틱으로 대체된 게 20세기 초니까, 지구상에서 생산된 어떤 칫솔도 아직 썩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숨쉬듯 쓰레기를 배출하는 삶은 과연 괜찮은 걸까. 쓰레기를 최소화하자는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 운동에 동참하는 상점, 제로 웨이스트 숍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부산·울산·경남에 잇따라 들어서고 있는 제로 웨이스트 숍을 찾아가봤다.

‘가치있는 소비’ 관심 점차 높아져
포장재 없는 친환경 제품 위주 판매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4곳 문 열어
판매 넘어 환경운동 거점 역할까지
생산단계 변화·제도적 지원 필요


■이래서 열었다 이래서 산다

제로 웨이스트 숍은 대개 포장재 없는 가게로 번역된다. 쓰레기 없는 삶을 지향하는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이라고 보는 게 쉽다. 재활용·재사용이 되는 친환경 제품을 취급하고 세제 등을 소분 판매한다. 포장재를 최소화하고 장바구니나 담아갈 용기를 가져오는 사람을 환영한다. 국내에는 2010년대 중반 이후 서울에 더피커, 알맹상점 등이 생기면서 이름을 알렸지만, 지역에서는 온라인쇼핑 외에는 관련 제품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부산·울산·경남에서 본격적인 제로 웨이스트 숍을 표방한 곳은 지난해 1월 경남 창원 마산합포구에 들어선 ‘마리앤하우스’가 처음이다. 같은 해 5월 부산 북구 덕천동 젊음의 거리 골목에 ‘천연제작소’가 들어서며 입소문으로 단골을 늘리기 시작했다. 울산에는 지난 달 남구 업스퀘어 인근에 ‘지구맑음’이 생겼고, 경남 김해에는 ‘오늘가게’가 20일에 막 문을 열었다.

가게 운영자들은 이전에는 저마다 다른 모습의 생활인이었다. 마리앤하우스의 윤체영 씨는 과자봉지도 세제로 씻어서 배출할 만큼 분리수거에 열심이었다. 천연제작소의 우지민 씨는 비누 공방을 하면서 노케미 라이프(화학물질 거부)를 지켰다. 지구맑음의 신유희 씨는 오랫동안 지역 생협 이사로 활동했고, 오늘가게의 정윤영 씨는 유치원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가 살아갈 미래의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들이 직접 가게를 운영할 결심을 한 공통의 이유는 절박함과 필요다. 윤체영 씨는 바다거북이 콧구멍에 빨대가 꽂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환경을 지키는 소비가 ‘하면 좋은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정윤영 씨는 설거지비누, 대나무칫솔처럼 인터넷으로만 살 수 있던 제품들을 이웃들에게 실물로 소개하고 싶어서 가게를 준비했다.

가게를 찾는 손님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20~30대 밀레니얼 세대는 가격이 비싸거나 사용이 불편해도 ‘가치있는 소비’에 관심이 높다. 마리앤하우스에는 친구의 이사 선물로 예쁜 용기에 소분 세제를 담아서 주려는 대학생이 멀리서 찾아온 적이 있다. 지난 18일 천연제작소에서 만난 임진영(29) 씨는 “평소 환경에 관심이 많았는데 유튜브를 통해 동네에 이런 곳이 있다는 걸 보고 찾아왔다”면서 고체치약, 대나무수저, 천연수세미를 골라갔다.



■함께하는 실천의 거점으로

제로 웨이스트 숍에서 살 수 있는 물품들은 다양하다. ‘쓰레기 없이 살기로 했다’는 책에 제시된 다섯 가지 원칙인 5R로 분류하자면, 필요하지 않은 포장재는 거절하는(refuse) 대신 소비를 줄이고(reduce), 재사용하고(reuse), 재활용하고(recycle), 썩히기(rot) 좋은 물품들이다. 천연수세미, 스테인레스 빨대, 샴푸바 같은 생활용품들이 많고, 재생지를 사용한 문구, 면이나 잘 썩는 소재의 생리대 등을 취급하는 곳도 있다.

가게들은 단순한 판매를 넘어 지역의 환경운동 거점이나 커뮤니티 역할도 하고 있다. 천연제작소와 마리앤하우스는 지난해 브리타 정수기의 폐필터 재활용을 촉구하는 캠페인에 참여해 지역 주민들로부터 다쓴 필터들을 모아 업체에 보냈다. 최근 기업으로부터 폐필터 수거·재활용 프로그램을 도입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두 가게는 재활용이 어려운 작은 플라스틱 병뚜껑을 모아서 업사이클링 제품으로 만드는 캠페인에도 함께하고 있다.

지난해 울산방송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7개월간 운영된 ‘착해가지구’는 처음부터 ‘실천의 장소’를 목표로 했다.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 내 주변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체험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공간이 필요했다. 실제로 많은 시민들이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다시 찾고, 시민단체나 교육청 같은 기관에서 제로 웨이스트 제품들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울산방송 조민조 피디의 말이다.

울산 남구의 지구맑음도 지역에 제로 웨이스트와 공정무역에 대한 인식을 널리 알리기 위한 공간이다. 지구맑음을 운영하는 진지한주식회사의 신유희 대표는 “생협 이사와 한국공정무역마을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생산자의 자립과 지속이 기후 문제와 떨어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면서 “지역에 관련 제품을 소개하고 더 나아가 시민 참여와 교육을 통해 제로 웨이스트와 공정무역 마을운동의 거점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부산의 예비사회적기업 (주)비치코밍코리아프로젝트가 이달 말 선보일 팝업숍은 거꾸로 실천에서 시작한 경우다. 최순도 대표는 “2019년부터 솔트컴바인이라는 이름으로 해양쓰레기를 줍고 쓰레기 활용 작품을 전시하는 활동을 하면서 삶 속에서 쓰레기를 줄일 수 있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설명했다. 팝업숍은 기장군 솔트갤러리에서 매장과 다양한 체험 공간을 결합한 형태로 운영될 예정이다.



■제로 웨이스트 사회를 위해

제로 웨이스트 숍이 지속 가능한 형태로 유지되려면 과제들이 많다. 운영자 입장에서는 다품종 소량 제품들을 개별 공급받고 재고 관리를 해야 하다 보니 아직은 이윤을 남기기 어려운 구조다. 플라스틱 포장재를 줄이기 위해서는 샴푸나 보디샴푸, 화장품이나 식품류의 소분 판매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관련 허가나 규제가 워낙 복잡해서 환경부조차 정확한 지침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쓰레기 없는 삶은 소비자의 의지나 유통 단계의 변화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국립환경과학원의 2017년 통계 분석에 따르면 포장폐기물은 연간 국내에서 발생하는 생활폐기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생활폐기물 중 포장폐기물의 비율은 무게로 보면 30~40%, 부피로는 50~60%에 달한다. 이 같은 추세는 택배와 1인 가구 증가 등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생산자가 나서야 하는 이유다.

정부도 지난달 ‘생활폐기물 탈플라스틱 대책’을 발표하면서 플라스틱 용기 생산 비중을 줄이는 등 생산 단계의 제도를 포함했다.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 소장은 지난해 10월 ‘포장재 없는 가게 제도 마련 국회 토론회’에서 생산자가 유통업자와 벌크 제품을 협의하는 등 규제를 연계할 것을 주장했다. 토론회에서는 프랑스 사례를 참고해 일정 규모 이상 지자체에 반드시 제로 웨이스트 마켓을 설치하도록 하는 방안도 제시됐다.

“동네 슈퍼마켓처럼 곳곳에 생긴다면 좋지 않을까요?” 우지민 씨는 부산에 천연제작소 외에도 더 많은 제로 웨이스트 숍이 생기기를 바란다. 오늘가게의 정윤영 씨는 “이런 공간들을 통해 친환경 소비에 대한 생각이 ‘굳이 불편하게’라는 의문형에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습관으로 바뀔 수 있다면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환경도 조금은 나아지지 않겠느냐”고 믿고 오늘도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글·사진=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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