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초 영상을 622초로 늘리면 보이는 것들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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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과 그 친구들Ⅱ-빌 비올라, 조우’ 전시

‘Going Forth By Day(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의 ‘The Path(행로)’ 2002. photo:Mathias Schormann © Bill Viola Studio ‘Going Forth By Day(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의 ‘The Path(행로)’ 2002. photo:Mathias Schormann © Bill Viola Studio

시간의 확장을 통해 감정을 발견하고 새로운 세상과 만나는 시간이었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우환과 그 친구들Ⅱ-빌 비올라, 조우’전은 관람객에게 여러 의미의 ‘조우’를 선사한다.

1951년 미국 뉴욕 퀸즈에서 태어난 빌 비올라는 비디오 아트의 거장이다. 빌 비올라와 이우환은 작품의 철학적 바탕에 동양 정신과 감성을 담아내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황서미 학예사는 “빌 비올라는 영상, 이우환은 조각이나 회화로 재료만 다를 뿐이지 ‘작품을 통해 초월적 공간으로 이끈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말했다.


비디오 아트 거장 작품 16점 전시

초고속 촬영 후 슬로 모션·역재생

시간 붙들어 초월적 세계로 초대



‘The Reflecting Pool(투영하는 연못)’ 1977-9. photo:Kira Perov © Bill Viola Studio ‘The Reflecting Pool(투영하는 연못)’ 1977-9. photo:Kira Perov © Bill Viola Studio

이우환 공간에 전시된 ‘이주’ ‘투영하는 연못’ ‘엘제리드호(빛과 열의 초상)’는 빌 비올라의 초기작이다. 1970년대에 제작된 세 작품은 ‘있는 그대로’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보여준다.

‘이주’는 파이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가지는 광학적 속성을, ‘투영하는 연못’은 작가가 바라보는 물질로서의 시간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하라 사막의 소금 호수에서 특수 망원렌즈로 촬영한 ‘엘제리드호’는 심리적으로 보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우환 공간에서 빌 비올라와 이우환의 조우를 마주했다면 미술관 본관 3층에서는 빌 비올라 예술 세계와의 조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첫 번째 방에 들어서면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 대표작가로 출품한 작품 ‘인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두 여성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여성이 다가와 인사를 나누는 내용으로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폰토르모의 ‘방문’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The Greeting(인사)’ 1995. photo:Kira Perov © Bill Viola Studio ‘The Greeting(인사)’ 1995. photo:Kira Perov © Bill Viola Studio

빌 비올라는 1990년대 이후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에 슬로 모션을 걸거나 역재생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확장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인사’도 45초짜리 영상을 10분 22초에 걸쳐 느리게 재생했다. 시간을 확장하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이 작품에서는 가운데 여성이 제3자의 출현으로 극도의 소외를 경험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2000년작 ‘아니마’는 1분 길이의 영상을 82분으로 시간 확장을 극대화했다. 초상화처럼 각각 프레임에 담긴 세 인물의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빌 비올라는 이 작품에 대해 “전시를 다 본 뒤에 다시 와서 볼 것”을 권유한다. 세 인물의 표정이 관람자가 아까 봤던 표정이 아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The Quintet of the Astonished(놀라움의 5중주)’ 2000. photo:Kira Perov © Bill Viola Studio ‘The Quintet of the Astonished(놀라움의 5중주)’ 2000. photo:Kira Perov © Bill Viola Studio

‘놀라움의 5중주’는 다섯 명의 배우가 서로 다른 감정으로 놀라움을 표현한 모습을 한 화면에 담았다. 각 배우가 어떤 놀라움을 표현하는지를 추적하던 관람객은 어느새 지금 자신의 감정과 조우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황서미 학예사는 “극단적 슬로 모션으로 연기자와 관람자 모두에게 시간이 정지된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공간을 만들어준다”고 소개했다.

두 번째 방에서는 ‘밀레니엄의 다섯 천사’와 조우할 수 있다. 시간의 확장과 역재생을 통해 천사들이 물에 빠져들거나 솟구쳐 오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섯 개의 영상이 따로 재생되기에 천사의 출몰과 한번에 만날 수 있는 천사 숫자가 불규칙적이다. “밀레니엄을 맞은 인간에게 보내는 위로의 메시지이기에 너희를 그리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는다”는 빌 비올라의 말을 믿어보기로 한다. 기자는 운 좋게 두 명의 천사를 봤다.


‘Five Angels for the Millennium(밀레니엄의 다섯 천사)’의 ‘Departing Angel(떠나는 천사)’ 2001. photo:Kira Perov © Bill Viola Studio ‘Five Angels for the Millennium(밀레니엄의 다섯 천사)’의 ‘Departing Angel(떠나는 천사)’ 2001. photo:Kira Perov © Bill Viola Studio

세 번째 방의 ‘이노센츠’와 ‘세 여인’은 ‘변모’ 연작에 속하는 작품이다. 성인이 된 젊은 남녀가 어둠에서 나타나 물의 장벽을 통과하는 ‘이노센츠’는 변태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상징하는 물의 벽을 사람이 뚫고 나오는 순간은 종교적 느낌도 강하게 전달된다. 영상미가 뛰어난 ‘밤의 기도’, 런던 세인트폴대성당에 설치된 ‘순교자들’(흙, 공기, 불, 물) 시리즈도 눈길을 끈다.

마지막 방에 전시된 ‘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는 ‘불의 탄생’ ‘행로’ ‘대홍수’ ‘여정’ ‘최초의 빛’ 5개의 영상으로 구성된다. ‘불의 탄생’이 비치는 입구를 지나 왼쪽에 전시된 가로 11m 크기의 ‘행로’부터 감상한다.

한여름 숲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행렬이 꼭 ‘인생 소풍’을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 같다. ‘여정’에서 배에 짐을 거의 다 실으면 ‘대홍수’에서 물폭탄이 터진다. 그러면 ‘여정’ 속 침대 위에 누운 할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한다. 뒤를 이어 ‘최초의 빛’에서는 구조대가 잠든 사이 물에서 사람이 부활하듯 떠오른다.


‘Going Forth By Day(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의 ‘The Voyage(여정)’ 2002. photo:Mathias Schormann © Bill Viola Studio ‘Going Forth By Day(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의 ‘The Voyage(여정)’ 2002. photo:Mathias Schormann © Bill Viola Studio

빌 비올라는 비슷한 시기에 아들의 출생과 어머니의 사망을 경험했다. 그에게 탄생과 죽음은 이어져 있다. 이집트 사자의 서에서 제목을 차용한 ‘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는 일상과 인생의 순환 과정을 이야기한다.

모든 순환의 과정을 보고 난 뒤 관람객은 탄생을 알리는 불구덩이를 통해 전시장을 빠져 나간다. 빌 비올라의 예술 세계를 마주한 이후의, 새로운 세상과의 조우이다.

‘이우환과 그 친구들Ⅱ-빌 비올라, 조우’는 영상과 영상설치 작품 총 16점을 전시한다. 작품 전체 상영시간을 합치면 약 6시간 30분이 소요된다. 부산시립미술관은 관람객이 각 작품의 주요 포인트를 놓치지 않도록 설 연휴부터 SNS를 통해 전시 관람 티저 영상을 공개할 예정이다. ▶‘이우환과 그 친구들Ⅱ-빌 비올라, 조우’=4월 4일까지 부산시립미술관 본관 3층, 이우환 공간. 사전예약 관람 문의 051-740-2600~1.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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