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부산시장 선거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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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훈 서울정치팀장

역사의 간계라고 하면 너무 거창한가. 부산이 20년을 매달려도 손에 닿지 않던 가덕신공항이 마침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는 과정을 복기하다 든 생각이다. 2002년 중국 민항기 사고,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토 지시로 시작된 가덕신공항은 이후 세 번의 대선, 4번의 총선을 거치는 내내 부산의 제1 숙원사업이었지만,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희망고문’이었다. 2016년 박근혜 정부가 김해공항 확장이라는 정치적 미봉책을 정부 정책으로 못 박은 이후에는 아예 동력이 사라지다시피 했다. 그랬던 가덕신공항이 국토교통부의 강고한 인천공항 일극주의, 수도권 언론의 ‘고추 말리는 지방공항’ 프레임, 대구·경북(TK)의 발목잡기 등 ‘3중고’를 뚫고 9부 능선까지 도달한 결정적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중도사퇴로 촉발된 4·7 보궐선거였다. 3년 전 사상 첫 더불어민주당 소속 시장으로 당선될 때 가덕신공항을 전면에 내세웠던 그의 돌연한 정치적 죽음이 수면 아래 가라앉은 가덕신공항의 활로를 뚫은 셈이니, 그 전개가 참 기묘하다 할 밖에.


가덕신공항 현실화 계기 된 이번 보선
시민 열망 받아안는 선거 효능감 만끽
그러나 여야 거대공약 대결 위험수위
공론화·검증으로 희망고문 차단해야

부산시장 보선이라는 자락이 깔리고, 부동산 수렁의 돌파구로 지역균형발전을 선택한 여권, 호남 출신 대권주자 이낙연의 PK(부산·울산·경남) 공략, 부산 탈환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의 위기감 등 다양한 정치적 동인(動因)이 절묘하게 맞물리면서 아득했던 신공항의 꿈은 현실로 성큼 다가왔다.

물론 가장 큰 동력은 긴 세월 동안 안전한 관문공항의 열망을 포기하지 않은 시민들의 단합된 힘이었다. 수도권 언론과 TK는 이런 지난한 과정을 외면한 채 ‘선거용’이라는 낙인을 찍지만, 부산으로선 ‘뭐, 그런 측면도 있지’하고 쿨하게 받아들이면 되지 싶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면 유권자가 원하는 정책을 내세워 선택을 받는 과정이야말로 선거라는 제도의 본질적 요소 아닌가? 20년 시민 숙원을 이런저런 눈치와 계산에 거부하다 표심 때문에 수용했다면, 부산시민으로서는 “이 맛에 선거한다”고 할 법하다.

그런데 부산시민들이 벌써 그 단맛에 중독됐다고 여기는 걸까? 부산대개조의 신호탄인 가덕신공항의 가시화가 이번 보선에 일으키는 연쇄반응 중에는 우려스러운 장면도 있다. 여야의 역대급 공약 전쟁이 대표적이다. 가덕신공항을 주도적으로 견인한 민주당은 호재를 놓칠세라 이를 기반으로 하는 트라이포트 메가시티, 풀필먼트 복합물류단지, 글로벌 배후도시 등 화려한 단어 속에 설익은 아이디어들을 당내 여러 기구를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동남권을 수도권에 대응하는 신 경제축으로 키우겠다는 의지와 논의는 환영하지만, 내부에서도 “너무 지르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온다.

야당이라 더 크게 맞불을 놔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국민의힘은 시쳇말로 “묻고 더블로 가”다. 부산시당이 최근 발표한 ‘1차 공약’만 해도 가덕신공항에 더해 경제·금융특구 지정,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 이전, 글로벌 24시간 커피 선물거래소 추진, 국가해양공원 조성 등 대선후보 공약을 방불케 하지만, 간략한 비용추계도 없다. 특히 주호영 원내대표가 부산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에 대해 “(중앙당에서)논의하는 게 없다”고 발언해 지역 여론이 공분한 뒤 일주일 만에 느닷없이 등장한 한·일 해저터널은 급조된 인상이 다분하다. 여기에 국민의힘 시장 예비후보들이 내놓은 ‘어반루프(진공튜프 운송수단)’, ‘플로팅 시티’, ‘삼성 3사’ 유치 역시 눈길을 끌긴 하지만, 임기 1년짜리 차기 시장이 과연 감당할 수 있는 일인가 싶다. 남은 2개월의 시간 동안 보다 정밀하게 검증되고, 걸러져야 할 문제다.

그럼에도 가덕신공항이 쏘아올린 부산대개조의 신호탄이 다양한 형태의 ‘그랜드 비전’들을 파생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인 수도권 집중과 지방소멸의 흐름을 반전시킬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어느 한 정파가 아닌 여야 모두의 것으로 수렴되는 모습은 뚜렷한 변화다.

사실 유권자들은 늘상 정책과 공약을 후보자 선택의 우선 기준으로 꼽지만, 실제 투표에서 공약 때문에 표심을 정하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러나 가덕신공항이 일으킨 연쇄 효과는 공약 하나가 도시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니 부산시민들은 모처럼 느낀 달콤한 선거의 효능감이 쌉싸래한 뒷맛으로 남지 않도록 각 후보의 공약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무엇보다 차기 시장은 행여 당선 뒤 ‘선거 공약을 누가 다 지키느냐’고 눙칠 생각은 말아야 한다. 희망고문은 20년으로 족하다. jc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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