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 한 번으로 가이드와 함께 적막한 포츠담 광장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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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투어·집콕여행해 봤더니

랜선투어 ‘비엔나 로망스 투어’의 채팅 창.

해외는커녕 고향 가기도 쉽지 않은 명절 연휴다. 돈과 시간 말고 바이러스가 여행을 막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동안 날려보낸 ‘빨간 날’들을 아쉬워하는 대신 온라인으로 떠나는 랜선투어와 집에서 즐기는 집콕여행을 체험해봤다. 결국 모두 새로운 여행을 꿈꾸는 여정이었다.



현지 거리에서 가이드 생방송
채팅창에서 실시간 소통
가이드 뒤 따라 걷는 착각
진짜 여행 떠나기 위한 준비


■전북 군산-두 개의 시간

군산은 부산에서 멀다. 2013년 여행 취재를 갈 때는 4시간 가까이 운전을 했는데 이번에는 오후 9시에 휴대전화와 클릭 한 번으로 갔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내놓은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랜선투어 상품 가운데 ‘군산 타임슬립투어’를 신청했다.

개별 안내된 영상 주소로 접속하자 실내 스튜디오의 가이드가 나타났다. 가이드가 선유도행 버스에서 보이는 바다 풍경 등 미리 준비된 생생한 영상을 재생하기 시작하자 퇴근 후 지친 직장인 모드가 서서히 물러나고 여행자 모드가 기지개를 켰다.

투어는 1899년 군산 개항부터 시작해 수탈한 쌀을 일본으로 나르던 일제강점기를 거쳐 주민협의체 주도로 진행된 도시재생까지 ‘시간여행’을 하는 구성이다. 영상 속에서 군산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8년 전 여행의 추억도 맥락과 현재성을 얻은 채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군산에서 촬영된 1998년 개봉작 ‘8월의 크리스마스’ 속 장면을 지금 골목 모습과 동시에 재생하는 대목처럼 두 개의 시간이 동시에 흐르는 것이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중국집 빈해원과 군산 최고의 명물 빵집 이성당도 등장했다. 채팅창도 이 때 가장 활발했다. 아는 맛이 더 간절하다. 해물이 고봉으로 얹힌 짬뽕과 긴 줄의 끝에서 만난 갓 만든 야채빵의 기억은 랜선을 넘어 여행자를 불러들인다.

“모든 대한민국의 지방도시들이 다시 활기를 찾는 날까지!” 2시간 가까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유쾌한 설명을 이어간 가이드는 이런 끝 인사를 남겼다. 그 날이 오면 일본식 가옥을 복원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자고, 야채수프와 직접 만든 잼이 나오는 이성당 모닝세트를 먹어보겠다.



■독일 베를린-오늘과 내일의 여행

2010년 생애 첫 유럽여행을 할 때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로 항공편이 결항되면서 초반 일정이 날아가버리는 바람에 독일 여정은 도착지 프랑크푸르트 공항이 다였다. 해외 랜선투어 여행지로 독일 베를린을 고른 건 그래서다.

한국 시각 오후 9시, 현지 시각 오후 1시. 투어가 시작되자 베를린의 흐린 하늘 아래 브란덴부르크 문을 배경으로 마스크를 쓴 가이드가 나타났다. 체감 온도 영하 7~8도라는 추운 날씨. 거센 바람과 자동차 소음 소리도 생생했다. 가이드가 직접 여행지 현장을 이동하면서 진행되는 생방송이다.

여정은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시작해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포츠담 광장과 베를린 장벽으로 이동하면서 90분간 이어졌다. 이번에는 빔프로젝터로 거실 벽에 큰 스크린을 띄워서 봤더니 가이드의 뒤를 따라서 함께 걷는 느낌이 난다. 메인 진행 가이드 외에 또 한 명의 가이드가 촬영과 채팅방 소통, 보조 진행을 분담해서 실시간 소통도 더 활발하게 이뤄진다.

가이드가 소개하는 랜선투어 속 도시 풍경은 과거에는 상상하기 힘들었을 지금 이 순간의 것이다. 테라스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식기 소리로 소란했을 맛집은 현재 영업 제한 조치로 문을 닫았다. 걸어가면서 설명을 하기 힘들 만큼 늘 인파로 넘치던 포츠담 광장에는 배달 앱 오토바이만 자주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랜선투어를 통해 다시 보기 힘들 오늘의 베를린을 만나는 것이다.

랜선투어의 또다른 가치는 무엇보다 여행 준비다. 상업 촬영이 제한돼 들어가지 못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지하의 박물관이나 가이드가 귀띔해준 인생 햄버거집이나 맥줏집을 메모하면서 언젠가 저 거리를 직접 걸을 날을 꿈꾸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빈-별을 찍는 시간

마지막 랜선투어 이후 여행 버킷리스트 일순위에 오스트리아 빈을 올렸다. 빈 랜선투어에서 가이드는 혼자서 카메라를 들고 막 비가 그친 빈 현지 거리를 이동하면서 설명과 촬영, 채팅창 소통을 동시에 해냈다. 알베르티나 미술관이나 빈오페라하우스, 호프부르크 궁전 같은 주요 관광지는 정작 코로나로 모두 문을 닫아 외관밖에 볼 수 없었는데도 투어의 여운이 길었던 건 가이드의 전문성과 영상 구성의 힘 때문이다.

특히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도시 빈의 정취는 음악과 함께하는 랜선투어의 매력을 한층 끌어올렸다. 트램을 타러 가면서 고향 베네치아를 떠나 빈에서 빈민묘지에 묻힌 비발디의 이야기를 들려준 뒤 트램 두 정거장을 이동하면서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을 배경음악으로 들려주는 식이다. 승객이 아무도 없는 텅빈 트램에서 비에 젖은 옛 제국의 수도를 보면서 듣는 사계는 어느 때보다도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모차르트의 레퀴엠 중 ‘눈물의 날’이 흐르는 동안 성 슈테판 대성당의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는 코스가 마지막 여정이다. 카메라가 어둑한 고딕 성당 내부에서 밝은 광장으로 나올 때 시간과 공간을 함께 건넌 듯한 애틋함이 남았다. 슈베르트의 음악을 마지막으로 투어가 끝나자마자 영상 속 장소들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여유로운 커피하우스에서 살구잼 바른 진한 초코 케이크도 당장 먹고 싶었다.

의사 출신 저널리스트 박재영은 책 ‘여행준비의 기술’에서 여행준비의 핵심 과정을 ‘구글 지도에 별 찍기’로 요약했다. 평소에 가고 싶은 곳들을 별 모양으로 저장했다가 별을 이어서 여정을 짜는 것이다. 세 번의 랜선투어가 끝나자 내 구글 지도에도 새로운 별이 무더기로 떴다.



■강원도-여행은 이어질 것이다

전북 군산에서 시작한 여행은 유럽을 찍고 다시 강원도로 돌아왔다. 문화체육관광부가 한국관광개발연구원, 지자체들과 함께 여행을 가지 않고도 여행의 설렘을 느낄 수 있도록 로컬 기념품을 묶은 ‘테마여행 10선 집콕 여행 꾸러미’ 가운데 강원 권역 상품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꾸러미에는 두부 스프레드, 쌀커피, 캠핑 담요와 글쓰기 키트, 머그컵과 강원 100경을 담은 100장의 일러스트 카드 ‘강원백씬’ 등이 담겼다.

설 연휴에는 ‘여행준비의 기술’이 권하는 대로 책과 영화에서 더 많은 별을 구해볼 작정이다. 일단 슈테판 츠바이크가 회고록 ‘어제의 세계’에서 묘사한 예술과 커피하우스의 도시 빈의 풍경을 훑고 난 뒤 빈이 배경인 ‘비포 선라이즈’를 시작으로 영화 ‘비포 선셋’의 파리, ‘비포 미드나잇’의 그리스를 차례로 여행할 예정이다. 베를린의 맥주와 학센 맛집, 여름에 열릴 평창대관령음악제 코스도 탐색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여행의 전체 여정을 통틀어 가장 설레는 순간은 가고 싶은 곳들을 골라 잇는 여행준비의 시간이었다. 진짜 여행을 떠날 날이 언제가 되든 별을 이어 별자리를 만드는 이 시간은 그 자체로도 충만한 즐거움이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있다.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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