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권의 핵인싸] 신도 주사위 놀이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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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물리학과 교수

코로나 바이러스의 크기는 약 100~200나노미터(nm)로 추정된다. 1nm가 10억 분의 1m니까, 코로나 바이러스는 1000만 분의 1m쯤 되는 커다란 분자 크기의 나노 입자다.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크기다. 좋은 현미경을 몇 겹으로 연결하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지만, 그렇지 않다. 아무리 확대해도 마이크로미터(㎛, 100만 분의 1m)보다 작은 것은 볼 수가 없다. 우리 눈에 감지되는 빛(알갱이)의 최소 크기가 그 정도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화소의 크기가 정해져 있는 디지털 이미지를 아무리 확대해 봐야 소용없는 것과 같다.

눈으로는 볼 수 없다면서, 왕관처럼 삐죽삐죽한 코로나 바이러스의 이미지는 어떻게 얻은 것일까? ‘때려서’ 보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이미지도 사실은 빛(알갱이)이 대상을 ‘때려서’ 반사된 결과다. 즉, 우리가 무엇인가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언제나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 빛(알갱이)처럼 대상을 때릴 도구가 있어야 한다. 둘째, 이 도구가 대상을 잘 때린 후 적절히 방출돼야 한다. 셋째, 방출된 입자를 제대로 감지할 검출기가 있어야 한다.


문명에 혁명적 변화 던진 양자역학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가져와

우리의 허위의식 깨닫는 계기 되길


나노 입자는 전자현미경으로 ‘볼’ 수 있다. 전자현미경이라고 불리는 장치는 우리가 알고 있는 빛(알갱이)을 감지하는 광학 장치가 아니다. 가속시킨 전자를 대상물에 반사시켜서 검출기로 감지하는 장치다. 일종의 전자 가속기다. 성능과 사양에 따라 10여m에 이르는 것도 있으며, 컴퓨터와 모니터 등 복잡한 전자 장치가 장착된 고가의 장비다.

무엇인가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단지 형태나 크기뿐이 아니라, 색이나 딱딱함 등 다양한 ‘느낌’을 얻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의 눈이 감지하는 빛(알갱이)의 크기보다 조금 큰 빛(알갱이)은 우리에게 ‘보이는’ 대신 ‘따뜻하게’ 느껴진다. ‘열’을 직접적으로 감지할 수 있어서, 체온계로도 쓰이는 적외선이다. 볼 수 있는 것보다 약간 작은 빛(알갱이)은 춥거나 흐린 날에도 피부를 그을리게 하는 자외선이다. 수저와 컵을 살균 소독하거나, 약한 피부나 눈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빛(알갱이)의 크기가 자외선보다도 더 작아지면, 몸속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엑스선’이 된다.

입자의 에너지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 입자가 반응하는 크기가 점점 더 작고 날카로워져서 더 작은 세계를 다양한 방법으로 터치할 수 있다. 이것이 미시 세계의 다양한 연구를 위해 ‘가속기’가 필요한 이유다. 높은 에너지의 빛을 만들어 내는 장치가 ‘방사광 가속기’다. 80년대 말부터 포항에 건설돼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고 있으며, 두 번째 방사광 가속기가 조만간 청주에 건설될 예정이라고 한다. 목표 달성에 대한 성공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지만, 대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기초과학연구를 위한 중이온 가속기 시설이 완공을 앞두고 있다. 무겁고 희귀한 핵을 가속시키는 장치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양자역학 때문이다. 에너지와 움직임(운동량)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연속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양(量, Quantity)을 가진 알갱이들(Quanta)의 단위로 끊어져 있다는 양자가설에 근거한 물리학 이론이다. 기존의 관점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들을 이해하기 위해 도입된, 완전히 새로운 생각이다. 사실 수학적인 표현과 추론이 대부분이어서, 이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려는 일은 상당히 주제넘거나 부질없는 짓이다. 흐름과도 같은 빛(알갱이)에도 에너지(움직임)에 따라 변하는 ‘반응크기’가 있다. 덕분에 입자와 파동에 얽매여 있던 우리의 직관을 뛰어넘어 미시 세계의 현상을 거의 정확하게 해석하고 예측할 뿐만 아니라, 이용까지 가능하게 됐다.

사실 양자역학이 물리학을 넘어 현대 문명에 몰고 온 변화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흐름(파동성)’과 ‘알갱이(입자성)’의 양면성을 갖는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 나아가 이 이중성을 동시에 정확하게 관찰할 수 없다는 발견이다. 이 필연적인 이론적 한계를 ‘불확정성 이론’이라고 한다. 이제까지 우리 주위에서 분명한 대상으로 인식되던 모든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가져왔다. 도대체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모든 경계는 분명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단지 확률로만 존재한다. 아인슈타인은 그래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며 양자역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코 멋있거나 직관적이기는커녕 현학적으로만 들리기 쉬운 양자역학이 최근 이렇게 유행처럼 회자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봤다. 모든 현상을 확률로만 설명할 수밖에 없는 양자역학이, 어차피 불확실도가 높아 가기만 하는 시대에 위로를 주고 있는 것일까. 기왕에 양자역학이 거론될 바에야 우리의 무감각이나 허위의식을 알아차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물리학자의 욕심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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