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예방 환경디자인 조례 ‘있으나 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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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침입 범죄를 막겠다며 부산시와 기초지자체가 범죄예방 디자인 조례를 만들었지만 현장에서 아무 쓸모가 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 정작 주거침입에 가장 취약한 1인 가구가 많은 오피스텔 등 소규모 공공주택은 아예 심의 대상에서 빠지는 등 조례 곳곳이 허점투성이다. 그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부산시는 2013년 10월 시민이 안전한 도시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건축물과 도시공간에 범죄예방 환경디자인을 적용하는 내용을 담은 ‘부산시 범죄예방 환경디자인 조례’를 제정했다. 이듬해인 2014년 1월 1일 시행됐다.

부산시, 구·군 제정 관련 조례
소규모 주택은 아예 심의 제외
범죄 취약 원룸엔 무용지물
계획 수립 등 전무 ‘선언’ 그쳐

그러나 취재진이 조례를 확인해본 결과, 주거침입 등 각종 범죄에 가장 취약한 1인 가구와 소규모 세대가 거주하는 공동주택은 아예 심의 대상에서 빠져 있다. 부산시가 해당 조례에 근거해 수립한 ‘범죄예방 환경디자인 기본계획’은 공공기관이 운영하거나 공공의 예산이 투입되는 시설에만 적용(표 참조)하기 때문이다. 지난 1월 27일 성폭행 사건이 발생한 대연동 원룸 같은 소규모 공동주택은 범죄에 더 취약한데도 사각지대에 있다.

다만 대규모 건물의 경우 부산시 경관심의위원회에서 범죄예방 디자인 측면에서 심의를 받기는 한다. 일반 주택의 경우 5층, 연면적 661㎡ 이상 규모의 건물이 경관심의 대상이다. 부산시 도시재생과 관계자는 “공공기관이 아닌 개인 소유 건물에 대해서는 건물주에게 범죄예방 디자인을 강요하기 어렵다”며 “이 조례는 공공이 먼저 나서 범죄예방 디자인을 실천하고 민간이 이를 자발적으로 따라오게 하겠다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부산시 조례 제정 이후 16개 구·군청도 범죄예방 조례를 만들기는 했다. 하지만 내용이 선언적 수준에 그칠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제대로 운용되지 않는 실정이다. 별도의 ‘범죄예방 도시디자인위원회’를 두도록 했지만 업무 부담을 이유로 현재 이 업무는 대부분 기존 경관심의위원회가 맡는다.

16개 구·군은 조례에 따라 지역별 특성에 맞는 ‘범죄예방계획’도 5년 단위로 세우도록 돼 있지만 이를 지킨 구·군은 부산에 단 한 곳도 없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구청 담당자는 “사실 경관심의위원회가 범죄 예방을 살피는 위원회가 아니고 기존의 업무도 있기 때문에 범죄예방 디자인에 대해서는 관심도, 전문성도 없다”고 털어놨다.

지자체 조례가 아니더라도 국토교통부가 고시를 통해 범죄예방 건축기준을 정하고는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권고일 뿐이다. 2019년 제정된 국토교통부의 ‘범죄예방 건축기준 고시’에는 ‘건축물의 외벽은 침입에 이용될 수 있는 요소가 최소화되도록 계획한다’고 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간에서 자체적으로 범죄예방 디자인 설계를 하려고 해도 지원 받을 근거가 없다. 예산 지원 근거가 있는 곳은 부산에서 남구청이 유일하다. 이 때문에 다들 1년에 1억 5000만 원 정도 지원되는 부산시의 한시적인 공모 사업에만 매달린다. 결국 범죄예방 디자인 측면에서 보면, 건축 심의 단계에서는 소규모 공동주택은 대상이 아니고, 지자체 조례는 제 기능을 못하고 있으며 민간에서 자체적으로 하려 해도 예산 지원을 거의 받을 수 없는 실정인 것이다.

일단 부산경찰청은 올해부터 남구청 조례를 샘플 삼아 각 구·군청을 상대로 예산 지원 근거를 조례안에 명시해줄 것을 촉구하지만 지자체들이 얼마나 따를지 미지수다. 부산디자인진흥원 최민준 팀장은 “각 지자체가 지역 특성에 맞는 범죄예방 계획을 수립하고, 건축심의 단계에서부터 검토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혜랑 기자 ra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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