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삶으로 승화시킨, 부산 마을 17곳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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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위대한 곳이다. 바다, 강, 산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설가 김동리가 ‘끝의 끝’이라고 칭했던 최후의 땅, 그 고난을 삶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부산문화재단이 출간한 <기억을 품다 흔적을 더듬다-부산의 마을>(호밀밭)은 위대한 땅 부산의 켜와 층을 보여준다. ‘해방 전후’(2편 3곳) ‘한국전쟁 전후’(6편 10곳) ‘1960년대 전후’(4편 4곳)로 시대 구분해서 부산의 이주정착촌 17곳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는데 그 마을 이야기 속에는 고난과 시련의 부산 현대사가 농축돼 있다. 향토사학자 주경업·김한근, 시인 최원준·동길산, 소설가 나여경·배길남, 사진가 박희진, 역사민속학자 류승훈 등 13명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부산문화재단 ‘부산의 마을’
이주정착촌 이야기 담아

피란민 아픔과 눈물 새겨진
초량동 45번지·소막마을
비석·돌산·흰여울마을…


첫째 부산의 많은 이주정착촌은 죽음-공동묘지 터 위에 만들어졌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죽음’ 위에 삶을 세울 정도로 그만큼 절박했던 곳이 부산이다. 비석마을(아미동)과 돌산마을(문현동)은 공동묘지 위에 세워진 마을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흰여울마을(영도)도 한국전쟁 때 인근의 피란민수용소가 넘쳐 피란민들이 공동묘지가 있던 자리에 움막을 지으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지금은 경치가 좋다고들 하지만 아차 하면 사람이 굴러떨어질 수 있는 가파른 벼랑 낭떠러지 위에 마을이 만들어진 거였다. 끝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살 수밖에 없었던, 그것을 해낸 곳이 부산인 것이다.

꽃마을(대신동)도 일제강점기 조성된 3만 평의 공동묘지 위에 피란민이 판잣집을 지으며 형성됐는데 1970년대 화훼단지가 만들어지면서 공동묘지의 기억을 ‘꽃마을’이란 이름으로 대체한 곳이다. 해돋이마을(청학동)도 공동묘지 아래쪽 산비탈에 형성된 마을이었고, 아바이마을(당감동)도 당감동 화장장 아래 판자를 엮고 가마니로 덮어 생명을 부지했던 이들의 마을이었다. ‘판잣집이나 움집이나 한두 평 땅에 지어진, 그야말로 게딱지 같은 집이었다.’(189쪽) 게딱지 집들이 마을을 형성했고, 그 속의 궁핍했던 삶들이 부산을 만들어왔던 거다.

둘째 한국전쟁이 오늘의 부산을 빚었다. 부산으로 몰려든 한국전쟁 피란민이 곳곳에 마을을 만들었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축지마을, 소막마을처럼 귀환동포들이 형성한 마을에 다시 피란민이 밀어닥치기도 했다. 부산 인구 추이는 1950년 한국전쟁의 파고를 또렷이 기록하고 있다. 1949년 47만여 명에서 1951년 84만여 명, 1955년에는 100만 명을 넘었다. 일제강점기에 ‘1960년대 중반 30만 명’으로 계획된 도시였다. 한국 현대사의 시련은 부산을 아비규환의 상황으로 무겁게 짓눌렀으며 그 흔적 속에서 이윽고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마을과 부산이 탄생한 거다.

그중 지금은 없어진 ‘초량동 45번지’ 일대는 거대한 피란민 마을이었다. 초량동 45번지는 현 부산과학체험관 일대 경부선 철로변의 허허벌판이었는데 여기서부터 현재 부산역 자리에 있던 거대한 초량 물웅덩이(일제가 바다 매립을 마무리하기 전에 해방이 된 거였다) 일대까지 3000세대 1만 명의 피란민들이 우글거리며 폭력,윤락과 뒤섞여 살았다. 이 일대는 1964년 부두지구 정리사업으로 정비돼 주민들은 연산동, 서동으로 강제 이주됐다고 한다. 또 동구 좌천동 봉생병원 뒤쪽에는 300여 평의 고무공장 창고를 피란민 50가구가 구획해서 살았던 ‘아사히고무공장 피란민마을’의 흔적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우암동 소막마을, 대저동 비행기 격납고집을 비롯해 징용막사에서 시작한 귀환동포·피란민들의 매축지 마을, 일본군 포진지에 들어선 가덕도 외양포마을 등은 부산 사람들이 견뎌낸 서럽고 아픈 삶의 줄기, 결국 희망으로 바꿔낸 헐벗은 삶의 밑바닥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이제 지내놓고 보니 그것들이 부산의 위대한 서사시다. 총론에서 최원준 시인은 “부산의 마을은 광복과 한국전쟁의 과정 속에 고향을 등진 사람들의 궁핍했던 삶이 눈물처럼 고여 있는 공간”이라고 썼다. 051-745-7224.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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