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채화 속 걷는 듯 여기가 ‘무릉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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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악양둑방 꽃양귀비 단지

‘플랜더스 들판에 양귀비꽃 피었네/ 줄줄이 서 있는 십자가 사이에/ 십자가는 우리가 누운 곳 알려주기 위해서지/ 하늘에는 종달새 노래하며 힘차게 날아오르지만/ 저 밑에 요란한 총소리 있어 노래 잘 들리지 않는다네’ (존 맥크래)


악양루 주변 낙동강 둔치
꿈길 같은 꽃물결에 탄성이 저절로
분홍·흰색 꽃양귀비에 수레국화·안개꽃도 섞여
돌로 만든 하트·천천히 도는 풍차도
일찍 만개한 꽃밭에 황홀


■개양귀비와 꽃양귀비

‘꽃양귀비’라는 꽃이 있다. 원래 이름은 ‘개양귀비’다. 색이나 모양 모두 예쁜 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개양귀비보다는 꽃양귀비라는 이름이 훨씬 잘 어울린다. 꽃양귀비라는 명칭은 당나라 최고의 미인이었던 양귀비에 비길 만큼 꽃이 아름답다고 해서 붙었다고 하니 얼마나 예쁜 꽃인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꽃양귀비는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해살이 풀이다. ‘양귀비’라는 이름 때문에 마약이 아니냐며 오해를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꽃양귀비로는 마약을 만들 수 없다. 유럽에서는 꽃양귀비 씨를 빵에 넣어서 먹는다. 기름을 짜기도 한다. 줄기는 채소로 먹는다. 빨간 꽃잎으로는 시럽이나 술을 담그기도 한다..

꽃양귀비는 5월 초·중순부터 피기 시작해 6월에 만개한다. 경남에는 꽃양귀비를 볼 수 있는 곳이 여럿 있다. 함안 악양둑방과 하동 북천면, 함양 상림공원 인근 등이다. 올해는 꽃이 일찍 피어 함안 악양둑방 등에는 각양각색의 꽃양귀비가 활짝 피었다.

함안과 의령, 창녕을 남강과 낙동강이 가르고 있다. 이 물길을 따라 338㎞의 둑이 조성돼 있다. 함안 사람들은 이 둑을 ‘악양둑방길’이나 ‘뚝방길’이라고 부른다. 악양루 주변에 자연 환경이 잘 보존돼 있는 수변공원 구간이다.



■악양둑방 꽃양귀비 단지

남해고속도로 함안IC에서 내려 ‘둑방길’을 달린다. 길 양 옆으로 피어 있는 붉은 꽃양귀비가 시야를 잡아챈다. 화려한 꽃잔치가 기다리고 있다는 기대감이 가슴을 두들긴다.

악양동 회관 앞 공터에 차를 세운다. 조용한 마을에는 벼농사를 앞두고 모내기 준비를 하고 있다. 논을 갈아놓은 곳도 있고 이미 물을 댄 곳도 보인다. 누렇게 익은 봄보리를 아직 베지 않은 곳도 있다.

평화로운 시골길을 따라 500m 정도 걷다보면 악양둑방 입구가 나온다. 둑 경사지에 접시 같은 꽃양귀비 꽃잎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벌어져 있다. 꽃잎에 얼굴을 가져다대고 향기를 맡아본다. 장미나 다른 꽃처럼 달콤한 향은 나오지 않는다. 단순히 풀냄새 같은 특이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이야! 여기야말로 무릉화원(武陵花園)이구나!”

악양둑방에 올라 강변 둔치를 내려다보자마자 입에서는 감출 수 없는 탄성이 튀어나온다. 이 풍경이 현실인지, 그림인지, 꿈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뛰는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얼굴에는 환한 미소를 숨기지 못한 채 열정적으로 휴대폰 버튼을 누르고 있다.

그야말로 꽃물결이다. 강에는 강물이 흐르는 게 정당한 이치인데, 이곳에는 꽃물이 바람을 따라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붉은 꽃물결 사이로 분홍색과 흰색 꽃양귀비, 푸른색 수레국화, 하얀 안개꽃이 섞여 있다. 꽃잎인 양 숨어 있는 바람개비도 돌고 있다.

둔치 오른쪽 끝에는 큰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한 나무 아래에는 작은 의자가 놓여 있다. 주변에는 수레국화가 푸른 꽃잎을 흔들며 마치 어린 강아지마냥 재롱을 떤다. 조금 떨어진 작은 나무 주변은 빨간 꽃양귀비와 하얀 안개꽃이 섞여 환상의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쪽에는 푸른 잔디가 덮인 둑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그 아래로는 때로는 파란색, 때로는 빨간색, 때로는 다양한 색이 환상처럼 어우러진 꽃밭이 1km 가까이 이어진다. 가끔 사진을 찍어가면서 봄바람에 흔들리는 꽃양귀비 사이를 천천히 걸어본다. 고색창연한 영화 속의 한 장면을 산책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름다운 수채화 속을 노니는 것 같기도 하다.

평일 낮이어서인지, 아니면 나이가 들면 꽃을 좋아한다는 속설이 사실이어서인지 꽃양귀비 단지를 둘러보는 사람들은 주로 중년 이상이다. 꽃양귀비와 똑같은 빨간 양산을 든 중년의 여인, 노란 우산을 들고 환하게 웃는 모녀, 오랜만에 나들이 나와 깔깔대며 웃는 여고 동창들, 마스크를 잠시 벗고 다정하게 사진을 찍어주는 70대 노부부, 카메라 여러 대를 어깨에 메고 다양한 각도를 잡아보는 아마추어 사진작가. 눈을 뗄 수 없는 멋진 풍경 앞에서 다양한 모습의 관람객은 하나같이 즐거운 표정들이다.

꽃양귀비 단지는 화려한 꽃 말고도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 둔치 곳곳에서 모은 크고 작은 돌로 만든 귀여운 하트와 의자, 우물 모양 돌 무더기와 꽃을 잔뜩 실은 지게, 돌로 쌓아올린 2m 높이의 아기자기한 돌 피라미드, 꽃밭에 둘러싸여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귀여운 인형, 시원한 바람에 천천히 돌아가는 풍차.

꽃단지를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둑방으로 올라간다. 둘이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가면 딱 좋을 산책로다. 둑 아래에 경비행기 세 대와 이들이 뜨고 내리는 맨땅 활주로가 펼쳐져 있다. 마을에 붙은 둑 경사로에는 노란 금계국 무리가 곱게 얼굴을 다듬고 있다. 산책로 맨바닥에 잠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곧 떠날 것을 아는 것인지 스치는 바람은 조금 더 머무르라며 허리를 붙잡는다. 하지만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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