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권의 핵인싸] 2030이 달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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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물리학과 교수

27세의 젊은 연구원 앤더슨은 안개상자의 수많은 사진을 살피다가 예기치 못한 입자의 궤적을 발견한다. 같은 자기장에서 반대 방향으로 휘어진 입자, 휘어진 정도는 분명히 수많은 전자와 유사한데 반대로 휘어졌다니! 이것은 양전하를 띠고 있다는 뜻이다. 지도교수에게 말씀드리자 무슨 정신 나간 얘기냐고 타박을 주었다. 전자의 전하량을 직접 측정하고 광전 효과 연구로 노벨상까지 받은 지도교수, 로버트 밀리컨 박사의 핀잔이었다. 이때까지 발견된 양전하를 띤 것들은 당연히 전자들보다 수천 배나 무거워서 휘어지는 정도도 확연히 달라야 하는데, 무엇이 잘못됐던 걸까.

역사적 사건은 신선한 반란에서 비롯
과학계서도 신세대 성장에 가슴 벅차
기성세대, 부끄러움과 책임 통감해야

예나 지금이나 국제학회는 학자들에게는 올림픽 같은 축제다. 비슷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모여서 각자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수많은 토론과 수다가 꼬리를 문다. 밀리컨 박사는 이 학회의 연찬에서 제자 앤더슨의 말도 안 되는(웃기는) 실험 결과에 대해 너스레를 떨었다. 마침 이 자리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연구 중이던 블로흐 박사가 있었다. 그는 바로 ‘음에너지 입자’에 대해 닐스 보어로부터 놀림까지 받았던 이론물리학자 폴 디랙의 고민을 알고 있었다. 이 우스갯소리가 그에겐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블로흐는 케임브리지로 돌아간 즉시 이 심상치 않은 실험 결과를 직접 재현해 보고, 훗날 앤더슨을 지지(그는 결코 앤더슨의 실험 결과를 가로채지 않았다!)하게 된다.

한편 노벨상까지 받은 지도교수 밀리컨의 핀잔을 들었던 앤더슨은 거듭된 안개상자 실험에서 반대로 휘는 가벼운 입자를 재차 확인하고 자신의 결과에 대한 확신으로 과학 잡지 에 지도교수 몰래 기고한다. 그림도 하나 없이 일종의 촌평처럼 실린 한 쪽짜리 논문의 제목은 ‘쉽게 휘어지는 양전하 입자의 존재 가능성’(The apparent existence of easily deflectable positives). 최초로 발견된 반입자인 양전자를 세상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폴 디랙의 ‘음에너지 입자’는 다름 아닌 반입자를 뜻하는 것이었다. 반입자는 쌍을 이루는 원래 입자와 모든 것이 같아서 마치 거울 속의 이미지처럼 원래 입자와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지만 회전 방향이 달라서 전기적으로 반대가 된다. 순수한 에너지는 입자-반입자 쌍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동시에 입자는 반입자와 만나면 소멸해 상당한 에너지로 변할 수 있다. 엄청난 에너지가 물질과 반물질로 바뀌는 우주의 시작인 ‘빅뱅’을 설명하는 동시에, 이후에 물질만 남아서 우주가 소멸하지 않고 존재하게 된 수수께끼에도 등장한다. 이 같은 과학적 사실은 오늘날 고에너지 입자 충돌 실험에서 거의 일상적으로 관찰이 가능하다.

훗날 여기에 나온 모든 과학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노벨상을 받았지만, 이들의 열정과 업적에 비하면 사실 노벨상 이야기는 너무 초라할 정도다. 고귀한 열정들의 우연찮은 조우가 만들어 내는 역사적 사건들은 어김없이 틀에 박힌 기성세대에 대한 신세대의 신선한 반란에서 비롯됐다.

과학계에서의 신선한 반란은 사실 거의 의도적이기도 하다. 학위논문을 일컫는 ‘티시스(thesis)’라는 용어는 정(正, These)-반(反, Antithese)-합(合, Synthese)의 출발점이 되는 ‘테제’를 의미하며, 학위논문 심사는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주장(Thesis)을 명징하게 지켜 낸다는 뜻으로 ‘디펜스(defense, 방어)’라고 불린다. 원자를 전자가 박혀 있는 푸딩 정도로 생각하는 톰슨을 검증하던 제자 러더퍼드가 원자핵의 존재를 최초로 알아내며 새로운 원자 모형을 만든 일이나, 반입자를 상상조차 못 했던 밀리컨을 뛰어넘어 제자 앤더슨이 양전자를 발견한 일은 학계에서 어색하거나 거북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젊다고 항변해도 더 이상 젊지 않은 586세대의 한 사람으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해 가는 대학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벅찬 행운이다. 어떤 세대는 여전히 독재에 대한 향수를, 어떤 세대는 여전히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집착을 이야기하지만, 자유분방한 신세대에게 정치는 더 이상 주요한 관심사가 아니다. 각자 주어진 환경에 길들여지고 무한 경쟁에 충분히 시달렸기 때문에,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거대 악보다 눈앞의 불공정과 경쟁의 결과에 민감하다. 거창한 명분과 당위, 비장한 정의감보다 실질적인 이득과 손해에 밝다. 그것이 정의라면 반드시 정당하게 보상받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딴에는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는데도 손해만 주어지는 사회 시스템이라면 결과적으로 기성세대를 포함한 어느 것도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신세대의 등장이 반가우면서도 기대와 염려가 교차하는 것은 그만큼 기성세대의 부끄러움과 책임이 큰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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