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미술가’ 안규철의 일상적 오브제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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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작가를 위한 다섯개의 질문Ⅱ’와 ‘49개의 방’(앞쪽 흰색 작품)이 전시된 전시장에 선 안규철 작가. 오른쪽 사진은 안규철의 ‘2/3 사회 II’. 안천호 촬영·국제갤러리 제공

말하는 미술가.

지금이야 미술작가가 말을 한다고 타박할 사람은 없으나 안규철 작가가 미술 교육을 받던 시절은 달랐다. “모더니즘이 미술의 진리처럼 되어있던 시대였죠. ‘작가는 작품으로 말을 해야 해’라는 분위기가 강했고 수업에서도 작품에 대해 분석적 설명이 없던 시절이었죠.” 안 작가는 미대를 다니면서 그런 점이 제일 힘들었다고 했다.

개인전 ‘사물의 뒷모습’
7월 4일까지 국제갤러리 부산점
30여 년 작업 세계 ‘회고’


안규철 개인전 ‘사물의 뒷모습’이 부산 수영구 망미동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계의 중추적 작가인 안규철의 30여 년 작업 세계를 돌아보는 회고전으로, 부산에서 열리는 그의 첫 개인전이다. ‘말하는 미술가’로 그가 걸어온 길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7월 4일까지 이어진다.

안 작가는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1980년부터 7년간 <계간미술> 기자로 활동하며 작업을 병행한다. 그는 1980년대 민중미술을 주도했던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동하며 정치적 상황이나 사회 부조리를 풍자하는 작품을 제작했다. “이러다가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을 갔습니다.”

독일에서 안 작가는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한국이나 독일에 매이지 않는 보편적 방식의 작업. 의자는 독일인에게도 한국인에게도 의자라는 점에 착안해 ‘일상적 오브제를 책처럼 읽을 수 있는 것’으로 풀어냈다. “의자 하나에도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의 아이디어, 고민, 지혜가 들어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생각을 되짚어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어요.”

이번 전시에서는 독일 첫 전시 작품을 재현한 ‘무명작가를 위한 다섯개의 질문Ⅱ’를 만날 수 있다. 1991년 독일의 대안공간에서 선보인 이 작품은 ‘삶’과 ‘예술’이라고 적힌 두 개의 문과 화분에 심은 의자로 구성된다. 예술가가 되기 위해 독일에 갔지만 인생과 예술 사이 어중간한 지점에 선 작가 자신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예술의 문’을 향한 의자 방향은 ‘그럼에도 예술가의 길을 가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세 짝의 구두를 이은 ‘2/3 사회’(1991), 세 벌의 코트를 하나로 연결한 ‘단결 권력 자유’(1992). 2021년 전시장에서 다시 만나는 작품들은 시대에 맞춰 변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전에는 밟기만 하고, 밟히기만 했던 구두가 이번에는 일곱 짝이 원을 이뤄 끝없이 밟고 밟힌다. 세 벌의 코트는 아홉 벌이 둥글게 뭉친 모습으로 확장해 타자의 진입을 더 견고하게 막는다.

안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씁쓸하고 질긴 음식’으로 표현했다. “유학 중 한국에서 전시했는데 당시 갤러리 대표님이 ‘안 선생은 고생 좀 해야 할 것 같아’라고 하셨죠.” 작품이 쉽게 팔리지 않을 것에 대한 우려였다. 다행히 귀국 후 1997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개원한 미술원 교수가 되면서 안 작가는 “돈벌이 걱정 없이” 작업할 수 있었다.

2004년 삼성미술관 로댕갤러리에서 전시한 ‘112개의 문이 있는 방’을 축소 모형으로 재현한 ‘49개의 방’과 2012년 광주비엔날레 참가작을 다시 그린 ‘그들이 떠난 곳에서-바다Ⅱ’가 눈길을 끈다. 특히 후자의 경우 독특한 전시 방식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를 기억하는 작품이다.

“공식적으로 사망이 확인된 사람은 백수십 명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실종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광주 어딘가에 소문으로 떠돌고 있는 그들을 소환하기 위해서 200개의 캔버스에 바다 그림을 그려 광주 시내 곳곳에 그림을 흩어놓았죠.” 안 작가는 광주비엔날레 전시 기간 내내 신문에 ‘그림을 찾습니다’라는 광고를 냈고, 돌아온 일부 그림 조각들을 전시장에 걸었다.

‘모자Ⅱ’라는 작품에서는 증인, 증거, 증언을 요구하는 시대, 눈에 보여야만 진실이 되는 세상에 대해 작가가 느낀 회의가 드러난다. 안 작가는 짧은 우화를 쓰고 그것을 드로잉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실존’하는 증거물로 모자를 전시한다. 작품 앞에서 관람객은 이야기가 진짜인지 아닌지 선택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안 작가는 매일 아침 A5 크기의 스케치북을 펴놓고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 2014년부터 <현대문학>에 연재한 글과 그림 69편을 엮은 책 <사물의 뒷모습>이 올 3월 출간됐다. 동명의 전시와 책 제목에는 ‘진실은 사물의 표면보다 보이지 않는 이면에 숨어 있다’는 의미가 담겼다.

“미술은 같은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해줘야 합니다. 미술가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문제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안 작가는 작품 앞에서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세상이 한 발 더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안규철 개인전 ‘사물의 뒷모습’=7월 4일까지 국제갤러리 부산점. 051-758-2239.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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