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성인지 감수성’ 교육만으로는 부족하다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변정희 ㈔여성인권지원센터‘살림’ 상임대표

법의 언어는 힘이 세다. ‘성인지 감수성’이 어느새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개념으로 쓰이고 있는 걸 보며 그런 생각이 든다. 2018년 대법원은 처음으로 ‘성인지 감수성’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판시했다.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사건에서 언론은 2심 재판부의 ‘성인지 감수성’이 1심 판결을 뒤집은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고 보았다. 성인지 감수성은 수사기관에 의해 벌어진 성폭력 2차 피해에 대한 대응에서도,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 사건에 대한 행정 당국의 대책 마련에서도 등장했다. 조직 전체가 성인지 감수성을 기르고, 여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에서도 이러한 성인지적 이해가 반영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기에, 성인지 감수성 향상을 위한 교육이 주로 그 대안으로 제시된다.

지금은 보편화된 ‘성인지 감수성’
2018년 대법원 판결문 처음 언급

감수성 오해 받지만 이성적 영역
피해자에 대한 종합적 이해 필요

개개인에게 책임 묻는 방식 한계
성차별 구조 진단·제도 개선 시급


그런데 성인지 감수성을 배운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용어를 이해하기부터 쉽지 않다. 여성가족부 홈페이지에 따르면 ‘성인지 감수성’은 “성별 간의 불균형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갖춰 일상생활 속에서의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해 내는 민감성”이라고 한다. “성별에 따라 요구되는 것이 차별과 불평등을 초래할 수 있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시작해,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차별적인 문제의 본질을 잘 파악, 해결책을 만들어 실천하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민감성 혹은 감수성이라는 것을 대체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우리 사회의 성인지 감수성을 향상시킬 수 있을까? 여성인권운동을 15년 넘게 해 온 필자조차도 성인지 감수성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말이다.

2018년 대법원의 판결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적인 문화와 인식, 구조 등으로 인해 피해자가 성희롱 사실을 알리고 문제로 삼는 과정에서 오히려 부정적 반응이나 여론, 불이익한 처우 또는 그로 인한 정신적 피해 등에 노출되는 이른바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즉 성인지 감수성은 차별에 대한 인식과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한 의식, 피해자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이해가 포함된 것으로 분명 감성의 영역이라기보다 이성의 영역에 가깝다. 이는 대부분 제도적 개선이 필요한 구조적 사안과 관련된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지 감수성은 개개인이 함양해야 하는 감수성 정도로만 인식되고는 한다. 이런 맥락에서 류영재 대구지방법원 판사는 대법원이 ‘성인지 감수성’이란 표현을 사용하면서 “이성이 아닌 감수성으로 판단하게 되었다는 오해가 발생했다”며, 성인지 감수성 판시 이후에도 성범죄 재판은 증거재판주의와 무죄추정의 원칙 아래 운영되며, 다만 피해자다움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으로 회귀하지 않을 뿐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한 연구 결과에서는 경찰 조직 내에서 여성 경찰관이 남성 경찰관보다 성인지 감수성이 더 낮은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그 이유는 남성 중심적인 조직을 여성이 더 적극적으로 내면화하고 수용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성 경찰관 비율은 2020년 기준 12.7%이며 총경 이상 고위직 경찰 여성 비율은 3%에 불과하다. 이는 군대 조직도 마찬가지다. 2020년 기준 현역 군 가운데 여군 비율은 7.4%에 불과한데, 방혜린 군인권센터 상담팀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소수의 여군들이 명예남성으로 길러지는 남성 중심적인 군대 조직 내에서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에 대한 여성들의 경험치가 누적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했다. 평시 군사법원과 군검찰의 근본적 문제와 한계를 언급하기도 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성인지 감수성은 교육과 인식 개선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직에 대한 구조적 진단과 제도 개선을 통해 가능한 문제가 아닐까.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조직 내 성폭력 사건과 2차 피해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성차별을 시정하고 성평등을 달성하기 위한 제도적 개선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것이다. 반복되는 권력형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면서 공공 조직에서는 성희롱·성폭력 고충 심의위원회를 구성하고, 고충상담실을 두어 처리하며 매뉴얼까지 마련했지만, 정작 고충심의위원회의 권고 사항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거나 성폭력 처리 과정에서 2차 피해까지 발생하는 등의 문제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성인지 감수성이 ‘차별적인 문제의 본질을 잘 파악, 해결책을 만들어 실천하는 능력’이라면, 그것은 교육만으로는 부족하다. 구조적 폭력에 대해 개개인에게만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귀결되지 않기 위해서는 성차별에 대한 제도적 개선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