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의 시인의 서재] 잡초의 권리를 옹호한 루이즈 글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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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시와사상’ 편집위원

새벽 4시에 일어나 일기 예보를 살펴보았다. 소나기가 온다 했는데 훌쩍 여행을 가고 싶어 소백산으로 무작정 떠났다. 소백산 정상이 알프스산맥 같은 이국적 풍경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우리나라 산의 이름에는 불교에 나오는 어휘와 겹치는 것들이 많다. 오랜 세월 동안 불교의 영향권 아래 살아온 내력 탓일 것이다. 소백산 정상에 가면 비로봉이 있는데 아마도 비로자나불에서 유래한 것이리라.

꽃보다 잡풀에 더 주목한 시인의 눈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우주의 풀잎 같은 존재임을 깨닫는 일

소백산까지 걸어가는데 중간에 후드득 비가 쏟아졌다. 하산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냥 직진을 했다. 내려오는 등산객에게 상황을 물어보니, 산 정상은 곰탕이라고 했다. 희뿌연 안개가 온 산을 덮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작은 우산을 펼치고 뚜벅뚜벅 걸어가니 자작나무 숲길이 나왔다. 자작나무를 보면 시베리아의 눈 내린 들판이 떠오른다. 안개가 자욱한 길을 불안하게 가다 보니 산 정상에 도달했다. 서풍이 거세게 불었고 한 여름인데도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래도 비로봉 정상까지는 가야 한다는 의지로 뚜벅뚜벅 걸었다. 비로봉에 도달하니 높이가 1439미터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소백산의 표지석을 보니 왠지 억울한 생각이 밀려왔다. 앞으로는 무모하게 일을 하지 말아야지 하는 반성문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거대한 바람이 서쪽에서 불어오더니 거대한 구름과 안개를 어딘가로 휘몰아 갔다. 안개가 걷히면서 드러나는 소백산의 비경은 너무나 신비스러웠다. 소백산 정상에는 아주 낮은 풀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여름 꽃인 비비추가 피었다 바람에 쓰러져 있었고 초롱꽃도 보였다. 바람이 부는 산의 정상을 점유한 무수한 잡초들의 노래가 휘몰아치는 안개 사이로 들려왔다. 옷과 신발이 온통 젖었지만 광활하게 펼쳐진 풀들의 휘파람 소리에 환희가 밀려왔다.

며칠 전에 읽은 루이즈 글릭의 시 ‘잡초(Witchgrass)’가 떠올랐다. 글릭은 지난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여성 시인이다. 영어 그대로 번역을 하자면 ‘마녀의 풀’이 더 적당할 것 같다. 학명은 ‘개기장속(屬) 잡풀’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 한국에서도 이 풀은 많이 발견된다. 이 시가 수록된 시집 은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의 감정을 꽃을 통해 표현한다. 중간중간 기도도 읊조린다. 백합, 양귀비, 나팔꽃, 설강화(Snowdrop) 같은 꽃들이 소재로 등장해 잔잔하게 삶을 위무하는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 가운데 꽃이 아닌 잡초에 주목하는 이 시가 묘한 감동을 준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잡초로서 나의 존재를 깨달아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대한 꿈과 야망을 추구하지만 우주의 먼 시선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한낱 풀잎일 수 있다. 잡초는 무시 당하고 때로는 짓밟히는 일상 안에서 묵묵히 이 지구를 지키는 존재이다. ‘잡초’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당신의 예찬이 필요하지 않아요,/ 나는 여기에 제일 먼저 있었어요,/ 당신이 여기에 있기 전부터,/ 당신이 정원을 만들기 전부터./ 나는 태양과 달만 있어도 이곳에 있을 거예요,/ 바다와 거친 들판만 남아 있어도 여기에 있을 거예요.// 나는 이 들판의 입법자가 될 겁니다.’

글릭의 잡초는 19세기 미국 시인인 월트 휘트먼의 ‘풀잎’의 정신을 계승한 측면도 있다. 민주주의의 토대를 웅장한 시로 노래한 휘트먼의 후예로서 그녀는 시적 어조가 장중하지는 않지만 정원에서 자라는 잡초의 사회적 위치를 변호하고 있다. 인위적으로 만든 아름다움이나 제도가 때때로 자연을 압도하지만 글릭은 그러한 것을 강하게 거부한다. 원시적 생명력 자체에 주목하는 시선이 서정 시인으로서의 그녀의 면모를 부각시킨다. 시어는 간결하고 쉬운 어조로 표현되지만 그 내면은 단단한 열매처럼 깊다.

글릭은 젊었을 때 거식증을 오랫동안 앓았다. 그것을 치유한 경험이 은연중에 시에도 녹아 있을 것이다. 음식을 거부하는 심리에는 사회가 부가한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증이 스며 있다. 아주 소량의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다 그것을 어기면 토하거나 폭식을 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살이 찌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행위가 반복되면서 주체는 점점 파괴되어 간다. 거식증의 이면에는 구강 충동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은 것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현대 사회가 강요하는 미의 기준이 여성 혹은 남성에게 가혹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

“뚱뚱해도 괜찮아. 있는 그대로의 네가 제일 멋져!”라고 말해 주는 문화가 필요하다. 외모나 실력 등에 집착하지만 정작 삶을 든든하게 해 주는 비밀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서로 아껴 주고 사랑해 주는 것이다. 늙고 추해져도 당당하게 자신을 가꾸는 지혜를 글릭의 시에서 배운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정상을 굳건히 지키는 소백산의 아름다운 잡초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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