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수의 지금 여기] 막말과 망언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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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예로부터 ‘입은 화를 불러들이는 문’이라 했다. ‘혀는 몸을 베는 칼’이라는 말도 같은 뜻이다. 그래서 중국 당송 교체기의 정치가 펑다오(馮道)는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어디를 가나 몸이 평안하리라’는 시(‘舌詩’)를 남겼다. 그는 역사적 혼란기 속에서 다섯 왕조에 걸쳐 열한 명의 군주를 섬긴 인물이다. 충절 대신 처세에 능해 영달을 추구했는지, 임금보다는 오로지 백성만을 위해 일했는지, 알 길은 없다. 다만 이건 분명하다. 격변의 세월을 재상으로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말조심, 입단속 덕분이었던 것.

선거 앞두고는 늘 험담과 말폭탄
최근 여야 대선 경선 모드 속
벌써부터 후보 간 ‘거친 입’ 난무

오염된 언어는 공동체의 독약
더 이상 발붙이지 못하도록
이성적인 유권자들이 걷어 내야




지금 한국 정치권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야 모두 대선 후보 경선 모드에 들어간 상태다. 아니나 다를까 근질거리는 입이 터지기 시작했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시대에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은 일종의 권리에 속한다. 하지만 한국 정치사의 지난날을 더듬으면 씁쓸할 기억들뿐이다. 선거를 앞두고 늘 볼썽사나운 막말과 실언에 온갖 욕설과 망언이 난무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얼마나 거북해하고 혐오스러워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선거의 계절만 돌아오면 망각의 강이 휩쓸고 고질병은 또다시 횡행한다.

돌이켜보면, 거친 입들은 주로 약한 고리를 건드렸다. 대표적인 것이 ‘지역’이다. 199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부산 초원복국집에서 터져 나온 “우리가 남이가”, 1995년 지방선거 국면에서 특정 고장을 휩쓴 “충청도가 핫바지냐”라는 구호는 지역감정을 자극해 표를 얻으려는 고약한 사례로 손꼽힌다. 그 생명력은 질기디질겨 불과 3년 전에도 ‘이부망천’ 발언이 튀어나왔다. “서울에서 살던 사람들이 이혼을 하면 부천에 가고, 부천에 갔다가 살기 어려워지면 인천 중구나 남구 쪽으로 간다.” 수도권 안에서도 저렇듯 지역 비하가 넘실거리는데, 비수도권을 보는 시선은 오죽할까.

날 선 언어가 노리는 또 하나의 약한 고리는 사회적 약자들이다. 2004년 17대 총선 국면에서 “노인들은 이제 집에서 쉬셔도 되고…”라는 특정 계층 폄하 발언이 나왔다. 당사자가 말실수라며 무릎 꿇고 사죄했지만 민심을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 밖에도 여성과 장애인, 중국동포, 외국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담은 막말 사례들은 차고도 넘친다.

지금은 나아졌을까? 그런 것 같지 않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의 본경선 TV 토론에서는 ‘네거티브 휴전’이 무색할 정도의 험담이 오가고 있다. “‘소칼’ ‘닭칼’ ‘조폭’ 같은 막말이 경선판을 진흙탕으로 만들었다. 모든 후보를 싸움꾼으로 만들었다.” 양강인 이재명·이낙연 후보의 난타전이 계속되자 오죽하면 같은 당 안에서 이런 비판이 나온다.

근자에 실언, 막말, 망언들이 쏟아지는 가운데에서도 야권인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의 설화가 유독 눈에 띈다. 그는 ‘주 120시간 노동’ ‘부정식품 선택의 자유’ ‘부마항쟁’ ‘건강한 페미니즘’ 발언에 이어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유출 없었다’까지 잇단 말폭탄을 터트렸다. 아무리 ‘여의도 신입생’이라지만 타 후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잦은 말실수는 의아할 정도다. 단순한 실언인지 오해인지 신념인지 이제는 헷갈린다는 사람이 많다.

윤석열 캠프의 정무실장이 이런 말을 했다. “검사 생활만 외길로 27년을 해 온 것에 비하면 사법과 법무 이외의 경제, 외교, 안보, 복지 등 대선 후보 주자로서 일정 수준 이상의 식견을 가져야 할 이슈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들이 검사 시절부터 축적됐다는 걸 느낀다.” 나아가 캠프의 총괄실장을 맡은 사람은 이렇게 한 마디로 정리했다. “내가 충분히 검증했다.”

그렇다면 윤 후보의 발언들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란 뜻이다. 정치인으로서 혹은 지도자로서 기본적인 인식 수준을 드러낸 것이거나 혹은 어떤 정치적 노림수를 갖고 의도적으로 던진 언사라는 말이 된다. 실언이라 해도 그 의도와 결과가 어긋났을 뿐 밑바닥에 무의식적인 욕심이 깔려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앞으로 야당의 경선 과정에서 더 독한 말들이 나오는 건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 국민들이 듣고 싶은 것은 삶에 대한 철학과 소신, 구체적인 정책 비전, 미래의 청사진이지 상대를 비하하는 막말과 험담이 아니다. 이를 모른다면 최고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 바로 지금 대선 경선 후보들이 해야 할 일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소명과 초심을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 말의 품격은 진실한 내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건강한 유권자들의 건전한 이성과 따끔한 감시가 반드시 필요하다. 공공 영역에서 독설과 망언이 다시는 고개 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것은 정치 불신을 가중시키는 우리 공동체의 독약일 뿐이니까.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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