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군국주의 전초기지… ‘기억해야 할 아픈 흔적’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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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굴기(窟記) 매몰된 역사] (상) 미항에서 군사기지로

1876년 조·일수호조규에 따라 개항해 한반도의 물류 중심지로 성장한 부산항은 세계적인 미항(美港)으로도 알려졌다. 그러나, 천혜의 경관이 뽐내는 아름다움 이면에는 역사의 상흔들이 여기저기 옹이처럼 박혀있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부산 앞바다는 팽창하는 일본 군국주의의 전초기지였다.

연합군 전투기 격추 위한 대공포
태종대·오륙도 등에 집중 설치
가덕도, 40년간 일본의 요새섬
포진지 굴 수십 곳서 강제 노역
증언할 주민 고령화·개발 추진
유·무형 슬픈 역사 묻힐 위기

■최전선 방어기지, 부산항

1940년대 초 아시아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은 연합군 공격을 막고자 부산항을 두르는 거대 해안 포진지를 구축했다. 일본 본토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한 부산항은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일본 방위성 소장 부산주둔 일본군 자료집’에 기록된 1940년대 지도에 따르면 부산 중구 포병연대를 중심으로 태종대, 청학동, 용호동, 감만동, 천마산 등에 중포병대가 배치됐다. 부산항 인근에 구축된 일본군 요새의 핵심은 영도구 태종대와 남구 오륙도였다. 이곳에 설치된 대공포들은 부산항에 침투하는 연합군 전투기를 격추하기 위해 대포를 쏴 ‘화망(火網)’을 만드는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태종대에서는 지금도 용도가 불투명한 당시의 군사시설이 목격되고 있다.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김윤미 HK연구교수는 “많은 일본군 병력이 배치됐기 때문에 태종대에는 포진지뿐 아니라 탄약고, 막사, 유류 저장소 같은 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과거 ‘장자등 포진지’로 알려진 오륙도 지하벙커에는 ‘16인치 포’가 설치됐다. 1920년대 초 강대국들의 해군 군축조약에 따라 일본이 함선을 줄이면서, 배에 있던 함포들을 장자등 같은 해안에 설치한 것이다. 동굴 내부에는 과거 포탄을 옮겼던 레일과 탄을 끌어올리던 축력기 흔적이 남아 있다. 장자등 포진지는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500여 명 군사가 주둔한 부산 최대 포진지로 알려졌다.



■섬 전체 요새화, 가덕도

부산 강서구 가덕도는 1904년 러일전쟁 때부터 무려 40년간 일본의 ‘요새 섬’이었다. 외양포를 비롯해 대항·천성·새바지 등지에는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뚫은 동굴이 수십 곳에 달한다. 연합군이 한반도에 상륙해 일본 본토를 공격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자 부산을 포함한 남해안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한 것이다.

지금도 크고 작은 동굴들이 절벽 해안에 벌집처럼 발견되고 있다. 새바지항 한 해안 언덕 아래에는 대형 ‘기관총 동굴진지’가 있다. 내부는 미로처럼 연결됐고, 해안을 바라보고 입구가 5곳이나 뚫려 상륙하는 연합군을 공격하기에 용이한 구조다. 새바지 마을 주민 A(80) 씨는 “옛날에 전쟁한다고 한국 사람들을 데리고 동굴을 팠다”면서 “하늘에 전투기가 날아다니고 분위기가 살벌했는데,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패망해 동굴이 실제 전쟁에 쓰인 적은 없다”고 전했다.

가덕도 남쪽에는 러일전쟁 때부터 구축한 일본의 본진격인 ‘외양포 포진지’가 옛 모습으로 남아 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는 러시아 발트함대를 공격하기 위한 구축한 진해 사령부의 방어기지로 건설됐다. 1904년 8월 포진지와 부대막사를 지었고, 이듬해 5월에는 편성 부대가 공식 상륙했다. 외양포 포진지에는 280mm 유탄포를 놓았던 포좌 6문을 비롯해 탄약고, 엄폐 막사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또 마을 곳곳에 목욕탕, 우물, 내무반, 사령관실, 무기고, 헌병부 등 일본군이 썼던 옛 건축물이 있으며, 인근 산에는 1940년대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구축한 대공포진지와 관측소도 구축돼 있다.



■동굴에 갇힌 ‘아픈 역사’

부산 해안에 벌집처럼 뚫려 있는 동굴들에는 강제노역 등 당시 주민들의 ‘아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태종대 지하벙커들을 어릴 때부터 목격했다던 주민 안원찬(83·영도구) 씨는 “동삼동 바다에서 포탄을 실은 차량을 4명이서 밀어 태종대 위까지 옮겼는데, 무겁다 보니 넘어지고 차량에 치이고 했다”고 밝혔다. 일부 옛 주민들은 태종대 지하벙커에서 집단학살, 암매장 등을 목격했다고도 전해 진상조사가 필요한 상황이다. 장자등 포진지의 경우에도 인근 주민 등 한국인을 6개월 동안 강제로 노역시켰다는 증언이 계속 나오고 있다. 600명가량이 동원됐는데, 외부에 군사기지의 위치가 노출되는 것을 우려해 한밤중 배를 타고 주변을 맴돌다 몰래 굴에 들어가 작업을 했다는 내용이다.

가덕도에서는 과거 원주민들이 일본군에 의해 섬에서 쫓겨나는 일이 빚어졌다. 주민 이성태(67) 씨는 “어른들에게 듣기로, 일본군이 강제로 불을 지르면서 주민들을 쫓아냈다”고 말했다. 쫓겨난 주민들은 일본 패망 이후 다시 섬에 돌아와 지금까지 거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군이 쓰던 군부대 시설을 ‘제비뽑기’로 나누어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같은 유·무형의 ‘아픈 역사’는 모두의 무관심 속에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점점 증언할 고령의 주민은 사라지고 있고, 개발로 시설이 철거될 위기지만 제대로된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홀로그램 영상 상영 등 나름 관광자원화가 된 외양포도 주변 신공항 개발로 역사 속에 묻힐 수 있다. 전문가들은 비록 침략과 탄압의 역사지만, 미래세대를 위한 가치 있는 역사 자원이 될 수 있는 만큼 조사가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동아대 사학과 전성현 교수는 “지금부터라도 공항 안에 가덕도 역사전시장을 만들거나 부분적으로라도 동굴 원형을 남기는 등 보전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승훈·남형욱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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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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