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도쿄올림픽, 스포츠 패러다임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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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진 편집부국장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무관중으로 열렸던 도쿄올림픽이 끝났다. 개최가 1년 늦춰지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졌고, 일부 국가와 선수는 코로나 감염 우려로 참가를 포기하기도 했다. 개최국 일본에서조차도 개막 자체를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었다.

올림픽이 폐막한 지 1주일이 지난 이 시점에서 당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다. 물론 도쿄올림픽이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는 식의 어려운 질문은 아니다. 아주 개인적인 질문이다. “이번 도쿄올림픽이 당신에게 어떤 감동을 줬느냐?”

팬데믹 상황 무관중 개최 첫 올림픽
정치 상황 등으로 국민 관심도 낮아
‘선수=한국’ ‘메달=성공’ 등 사라져
성취와 열정, 정신적 극복에 초점
‘스스로 멋진’ 신인류 성과에 열광
경기를 즐기는 패러다임 정착되길

코로나와 무더위에 지친 시민 대부분이 이번 도쿄올림픽 동안 선수의 노력과 열정에 크고 작은 감동을 했을 거라 믿는다. 하지만 그 감동은 예전과 사뭇 달랐다. 대한민국의 이름을 가슴에 새긴 전사가 다른 나라 선수와 싸워 이겨 낸 국수주의적 감동, 소위 ‘국뽕’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선수 개개인이 일궈낸 성과와 열정, 잠재력에 감동했다. 그 감동은 금메달이 아니어도 상관없었고, 대한민국 선수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Z세대(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인 황선우는 수영 자유형 200m에서 150m 구간까지 선두를 질주한 뒤 “‘노빠꾸 질주’였다. 100점 만점에 130점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그의 수영 실력만큼이나 거침이 없었다. ‘스스로 멋진’ 신인류의 성과에 전 국민은 열광했다.

양궁 3관왕에 오른 스무 살 안산은 활을 쏠 때마다 “쫄지 말고 대충 쏴”를 마음속으로 외쳤단다. 10점을 쏴 대던 어린 궁사가 화살을 쏘기 전 되뇌던 말이 “대충 쏴”였다니, 이 말은 잘하기 위해 늘 긴장해야만 했던 이전 세대에게 충격을 줬다.

남자 높이뛰기 결선에서 2m 35㎝를 넘어 한국 신기록을 세운 우상혁을 보자. 4위를 차지했지만, 그는 경기 내내 환한 표정으로 경기를 즐겼다. 마지막 시도에서 실패한 뒤 절도 있게 전 국민을 향해 거수경례를 날렸다.

신인류만 감동을 줬던 건 아니다. 이탈리아와 펜싱 사브르 단체 3, 4위 결정전에서 10점 차를 뒤집은 여자 펜싱대표팀과 12-14 한 포인트만 더 주면 게임을 지는 상황에서 ‘절대 포기는 없다’며 4점을 따내 한·일전을 16-14로 승리한 여자 배구대표팀. 이들의 포기를 모르는 열정은 국민 전체에 큰 감동을 줬다.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동메달을 놓친 역도의 김수현, ‘아름다운 꼴찌’ 럭비 대표팀, 남자 요트 하지민, 남자 다이빙 우하람, 클라이밍 서채현 등 비인기 종목 선수와 메달을 아깝게 놓치면서도 즐거워했던 ‘4위’들에게도 응원과 격려가 쏟아졌다. 그동안 이런 올림픽은 없었다.

사실 도쿄올림픽은 코로나와 정치적 상황 때문에 언론의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한 올림픽이었다. 여기에 문재인 대통령의 개회식 참석을 놓고 한·일 간 마찰을 빚으면서 국내 언론이 의도적으로 외면한 측면도 있다. 그러다 보니 일반 국민들이 메달 유망 종목과 선수를 제대로 알지 못할 정도로 국가적 관심이 적었다.

역설적이지만 이런 국가적 무관심(?)으로 인해 국민들은 선수 개개인과 대표팀에 더 집중했다. ‘선수가 곧 대한민국’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선수의 육체적 기량과 압박감을 이겨 내는 정신적 강인함에 매료됐다. 이에 선수들도 압박감과 긴장감에서 벗어나 더 나은 개인적 성과를 일궈 냈다.

반면 최고 인기 종목으로 이번 도쿄올림픽에서 메달 압박을 강하게 받았던 축구 대표팀과 야구 대표팀은 제대로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살아 있는 체조 전설 시몬 바일스(미국)는 이번 올림픽 여자 단체전에서 도마 연기를 펼친 뒤 돌연 기권했다. 대회를 앞두고 인스타그램에 “세상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 기분”이라며 중압감을 호소한 그는 경기 뒤 “나의 몸과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을 포함한 전 세계 팬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 남작은 올림픽의 의의에 대해 “승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데 있으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보다 노력하는 것이다”고 했다.

이번 도쿄올림픽은 코로나19와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선수들이 ‘국가대표’와 ‘메달’ 압박감을 덜 느끼고 즐긴 첫 올림픽이었다. 한국 팬들도 대한민국과 메달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에서 올림픽을 즐겼다. 그래서 승리도 좋지만, 승리를 향해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모습 자체가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줄 수 있었다. 이번 올림픽을 계기로 국적과 메달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버리고 경기 자체를 즐기는 새로운 관전 패러다임이 정착되길 기대해 본다.

ksci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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